▲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내가 교회사를 전공할 수 있었고 특히 어거스틴을 전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학문과 사역과 인생과 관련하여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교회사와 어거스틴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한철하 박사님이 계셨다. 어거스틴은 고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지혜와 행복을 추구하며 육체의 향락과 이단 사교와 희랍 철학 등에 탐닉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결국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로, 바울 서신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므로, 참된 평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32세 때 무화가 나무 밑에서 개종의 체험을 한 이후 76세 때 히포의 감독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가 믿게 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진리 탐구로 평생을 보내며 하나의 포괄적인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수립했다. ‘무지개 색깔’의 신학체계를 수립했다고 하겠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은 고대의 모든 신학적 전통을 종합하는 자리에 서 있었으며 중세와 그 이후의 모든 신학 전통을 수립 발전시키는 관문에 서 있었다고 하겠다. 한철하 박사가 지적한 대로 “고대와 중세와 현대를 통해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상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어거스틴을 알지 못하고 고대나 중세나 현대를 바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어거스틴의 생애의 하이라이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출생과 소년 시절

어거스틴은 30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아프리카의 소도시 타가스테(Thagate)에서 주후 354년에 출생했다. 타가스테는 아프리카의 북단 한 고원지대에 놓여 있었는데 칼타고의 행정구역으로 로마의 통치 하에 있으면서도 누미디아(Numidia) 옛 왕국에 소속되어 아프리카의 보수적인 문화전통을 이어 받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흑인이었는지 백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한마디로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한 시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 대한 자랑과 기대가 대단했다.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아버지의 희생적인 노력을 고마워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세속적 성공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들의 내면 생활의 진보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트리키우스는 그의 총명한 아들을 칼타고로 보내기에 충분한 돈을 긁어 모은 후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어거스틴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건한 여인이었다. 어거스틴에에게 있어서 그녀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녀를 통해서 당신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권면을 거절한 것은 곧 당신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곤 했다. 모니카는 기독교 가정에서 엄격하게 자라났다. 그녀는 인내와 온유의 성품으로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인내와 눈물의 기도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비범한 삶을 살았다. 모니카는 불성실하고 불같은 성품의 남편에게 즉시 대드는 대신 조용히 참고 기다리다가 그의 분이 가라앉은 후에 비로서 자기가 정당했음을 설명하곤 했다. 결국 모니카는 인내와 기도와 전도로 그의 남편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할 수 있었다. 모니카는 자기를 오해하고 미워하던 시어머니도 인내와 온유로 굴복시키고 말았다. 결국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자기와 며느리를 이간시키던 종들을 붙잡아 매를 때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시모와 자부는 놀라운 화목을 이루었다. 모니카는 싸우는 사람들의 화해자로 등장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사랑하게 되곤 했다.

“그녀는 우리 모든 사람을 섬겼는데 마치 그녀가 우리 모두의 딸인 것처럼 행했습니다”

모니카는 누구보다도 어거스틴을 깊이 사랑했다. 아들의 영적 생명을 출생시키기 위해 어머니는 해산의 고통을 거듭거듭 겪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되 폭포수 같은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격렬한 사랑 가운데는 “세상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에 대한 애착이 좀 심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그 옆에 두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그렇지 않으랴마는 나의 어머니는 더 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의 유아시절을 회상하며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몸을 붙여 게걸스럽게 빠는 아기였다. 자기의 의사가 전달되지 않을 때 분노를 터트리는 아기였다. “어린 아기가 천진난만하게 보인 것은 몸이 연약했기 때문이지 그의 마음이 천진난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시기에 가득찬 어린 아기를 보았습니다. 말은 할 줄 몰랐지만 다른 아기가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것을 보면 분이 치밀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진솔한 마음과 눈과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타가스테에서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으려고 애썼고 다른 소년들을 경쟁에서 물리치려고 발버둥쳤다. 그는 학교에서 매를 맞는 굴욕을 당할까 봐 애써서 공부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은 웅변의 대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내용은 보잘 것이 없었다. 버질, 시세로, 살루스트, 테렌스 등의 이교 작품들을 줄줄이 암기하는 방식의 교육이었다. 이런 마당에서 희랍어와 같은 외국어 교육은 거의 불가능했다. “내가 소년시절에 희랍문학을 그다지도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지금도 희랍문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라틴문학을 그렇게도 좋아했습니다…애네아스(Aeneas)가 방황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디도(Dido)가 사랑 때문에 자살하고 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디도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거스틴이 받은 교육의 목적은 “화술을 배우는 것, 사람들을 설득시켜 자기의 생각을 따르게 하는 웅변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육으로 자기 표현법을 배웠다. 그는 스스로 눈물을 흘릴 줄 알았을 뿐더러 남들을 울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43세의 감독 어거스틴은 소년시절의 교육방식을 이렇게 회고했다. “오 나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 그때 나의 웅변이 다른 학우들의 것보다 더 많은 박수갈채를 받은 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실제로는 모두 연기와 바람뿐이 아니었습니까?”

(계속)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