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초대교회에 나타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신학적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주제였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기 원했던 것이었다. 사람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3:11)고 기록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자연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더듬어 살피는 길이 있다. 둘째, 사람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더듬어 살피는 길이 있다. 이 두 가지 길을 '자연 계시'의 길이라고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모습을 더듬어 살피는 길이 있다. 이 길을 '특별 계시'의 길이라고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을 보게 하는 안경과 같고 하나님께로 가는 기차 선로와 같다고 했다. 예수님과 바울과 칼빈은 여기다 한 가지를 더했다. 넷째, 성령의 가르침과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모습을 보다 친밀하게 더듬어 살피는 길이다.

“삼위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지적인 시도”

삼위일체 교리란 하나님의 삼위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지적인 시도(an intellectual attempt)라고 하겠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소유하고 있는 독특한 신관이다. 구약 안에서 삼위일체적 암시들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밝히 드러난 교리도 아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받아 들여질 수도 없는 불가해한 교리였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강림으로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지면서 체험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또는 “육신을 입으신 말씀”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성령의 사역을 날마다의 생활에서 체험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높이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약도 삼위일체적 교리의 형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신약의 관심은 존재론적 내지 형이상학적 진술에 있지 않았고, 기능적 및 사역적 서술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신약에서는 ‘삼위일체’나 ‘동일본질’(homousios) 같은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삼위일체적(정확히 말해서 이위일체적) 진술이 있다면 그것은 요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다”라고 하겠다. 신약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신적 사역’을 기술한다. 즉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메시야와 구주로서의 예수의 ‘신적 사역’을 기술한다. 신약은 예수가 이미 태초부터 창조의 신적 사역에 함께 하신 분으로 그리고 때가 차매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신적 사역을 수행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신약은 성령을 존재론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성령의 ‘신적 사역’을 기술한다. 즉 성령을 창조와 구원을 이룩하시고 적용하시는 ‘신적 사역자’와 ‘보혜사’로 묘사한다.

초대교회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지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체계화하려 했을 때 초대교회는 각기 그 교회가 처한 문화나 전통에서 이용할 수 있는 도식(scheme)이나 유추(analogy)를 사용해서 표현하려고 했다. 즉 자연적인 유추인 태양과 빛과 열의 관계나 나무와 가지와 뿌리의 관계를 비롯해서 천사론 또는 로고스 사상들을 사용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표현하려고 했다.

“삼위의 구분과 일체”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 초대교회에서 점차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즉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인데, 이 세분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초대교회에서 점차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했다. 한가지 방향은 세분의 ‘구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쪽으로, 다른 방향은 세분의 조화와 ‘일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한가지 방향은 성부만을 높이 경배하는 경향이나, 성자만을 높이 경배하는 경향이나, 성령만을 높이 경배하는 쪽으로 발전했고, 다른 방향은 세분이 곧 하나님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히브리적 전통에 서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종교 문화적 모델은 ‘천사론’이었는데 그들은 성자 그리스도를 천사장 미가엘에 비교하여 이해했고, 성령을 천사장 가브리엘에 비교하여 이해했다. 그런데 천사론의 관점에서 이해된 삼위일체 이해에는 제한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리스도와 성령이 성부 하나님보다 좀 낮은 분들로 즉 종속된 분들로 묘사되었다. 에비온 파나 후에 생긴 여호와의 증인도 이 부류에 속한다. 희랍적 전통에 서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종교 문화적 모델은 ‘로고스론’였는데 그들은 성육 이전의 그리스도를 희랍 철학의 전통에 나타난 선재적 로고스, 즉 내재하는 신적 이성과 비교하여 이해했고, 성령을 신적 지혜에 비교하여 이해했다. 그런데 로고스론의 관점에서 이해된 삼위일체 이해에도 제한점이 있었다. 그리스도와 성령이 성부 하나님보다 좀 낮은 분들로 즉 종속된 분들로 묘사되었다.

삼위의 구분을 강조하는 경향의 삼위 일체론과는 대조적으로 삼위의 연합과 통일과 일체를 강조한 그래서 삼위의 구분을 무시하는 종류의 삼위일체론이 나타났다. 그것이 초대교회에 나타난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이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창시자인 노에투스(Noetus)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아버지 자신이었는데 아버지가 탄생했고 아버지가 고난을 당했고 아버지가 죽으셨다”고 했다. 사벨리우스(Sabellius)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언급하면서도 개별적인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고 한 인격이 다른 모양과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했다. 즉 한 하나님이 때로는 창조주로, 때로는 구속주로, 때로는 성화자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한 배우가 여러가지 역으로 출연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바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Trinity is beyond human understanding) 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소원한다. 다음에 그 이야기를 계속한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