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믿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론(사상,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던 교만을 버리고, 자기의 생각을 예수님에게 복종시키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믿음은 생각의 변화입니다. 생각이 변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생각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이 가져야할 자세를 선포할 때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메시지 역시 회개의 복음입니다.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또한 그 제자들의 복음도 회개입니다. (막6: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회개가 무엇입니까? 생각이 변화하는 경험입니다. 생각이 변하면 당연히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생각과 행동은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생각을 먼저 살피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믿음을 가져가는 자세 중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참된 믿음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영적 경험의 간증

본문에는 바울의 간증이 나옵니다. 그러나 자세히보면 자랑으로 시작되어 진행되다가 나중에야 간증이 나옵니다. (1절) “무익하나만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는 말로 말문을 열면서, 또한 자신이 14년 전에 경험했던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온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실로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당시에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의심하며 도전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영적 지도력을 변증하기 위해 이런 자랑을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자신을 위한 자랑이요, 변증이요, 어찌보면 변론에 치우친 경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에 어리석은 짓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자랑하기를 포기합니다. 그 이유는 (6절) “자신을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해서”라고 합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데 너무 대단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진정한 간증을 합니다. 세 번씩 가시의 문제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9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응답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자랑을 간증으로 바꾸는 장면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전반부나 후반부나 모두 바울의 영적 경험입니다. 자랑도 간증도 영적 경험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부는 자랑이고 후반부는 간증입니다. 즉, 둘은 같은 영적 경험이지만 목적은 분명 다릅니다.

자랑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간증은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바울의 간증은 매우 싱거운 것입니다. 내용인 즉, 하나님께 가시 제거를 위해 기도했는데 결국 하나님은 ‘NO’라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살기로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간증이라고 여기십니까? 또한 이러한 간증을 자신있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간증거리를 찾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더러는 주님의 평안한 인도와 축복으로 인해 큰 어려움이 없으며, 따라서 간증거리 될 만한 것이 별로 없다고 말을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삶이 마치 축복받은 삶인 양 인식하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간증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랑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랑과 간증의 차이를 모르고 믿으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허망하고 미련한 생각의 소유자입니다. 생각을 바꿔야 간증을 합니다. 그래서 간증을 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2. 신앙적 담대함

자랑과 간증의 구분이 어렵듯이 세상적 담대함인 배짱과 믿음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자랑을 하고는 간증을 했다고 하듯이 배짱을 부리면서 그게 믿음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믿습니다!”라고 부르짖고서 배짱을 부린적이 없으십니까?

배짱과 믿음은 둘 다 용기라는 면에서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짱은 자신으로부터 나온 용기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용기는 믿음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은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즉, 출처가 분명 다릅니다.

이와 반대개념인 열등의식과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통점은 자신을 낮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열등의식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것과 겸손한 생각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것은 출처가 다릅니다. 할 수 없는 능력이어서 안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 겸손하여 안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온 자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한 영적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랑이 되기에 그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다윗과 골리앗 모두 담대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넘쳤습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반면 골리앗은 칼과 창과 자신의 승리의 경험을 가지고 나아오는 용기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담대함으로 전쟁을 수행하지만, 골리앗은 배짱으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힘은 하나님께 있지만, 배짱의 힘은 자기실력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의 승패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원동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용기에 있음을 잘 압니다. (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결국 다윗이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직 자신의 능력, 실력, 경험, 용기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배짱을 믿음으로 바꾸십시오. ‘나는 할 수 있다’는 배짱도 생각이고, ‘나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생각입니다. 결국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3. 변화와 성장

자랑을 간증으로 바꾸는 바울,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기를 가지고 싸움에 나가는 다윗, 이들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때 간증거리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각의 변화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고후10:3~4)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비록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육체의 모습으로 살지만 우리들의 싸움은 육체의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투인 것입니다.

세상은 견고한 진입니다.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 성도로 살면서 여러 문제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넘어집니까? 왜 축복받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견고한 진을 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자랑거리만 찾고 내 배짱으로만 사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승리와 축복은 자랑을 간증으로 바꾸고, 배짱을 믿음으로 전환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을 바꾼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고후10:5~6)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나약함과 허약함, 열등의식도 바꿔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믿음의 모습은 겸손이라는 허울좋은 모양으로 색칠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주님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만 할 수 있음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달려나가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 즉, 자신의 존재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존재로의 자리매김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변화될 수 없으며 성장 또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의 변화는 신앙의 성장을 가져다줍니다. 성장이란 단어 자체가 변화를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씨앗이 새순이 되고, 새순이 가지가 나고, 가지에서 열매가 달리는 걸 성장이라고 합니다.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내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열매를 선사하게 됩니다. 이게 믿음의 원리입니다.

“은혜를 깨달은”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은 생각의 작용입니다. 듣고 깨달으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마지막을 절규로 끝내고 있습니다. (고후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다시 생각할 것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시 생각하십시오! 자랑이 아닌 영적 경험의 간증을, 자신의 배짱이 아닌 신앙적 담대한 믿음으로 바꾸고 생각의 변화를 통한 믿음의 성장으로 열매를 거두십시오.

박비민 목사(비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