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과 동역은 현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의 하나이다. 역사적 안목과 초문화적 경험이 부족한 한국교회의 선교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다. 교회 분열과 선교 갈등에 결코 뒤지지 않는 한국교회와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여전히 협력과 동역이다.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기 전에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볼 때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은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나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세계를 바라보시는 눈과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폭 넓은 눈과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이사야 19:23-25이라고 생각한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서 복이 되리라 그 날에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나의 백성 나의 산업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높고 넓은 생각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는 열정이 뜨겁다고 할지라도 북한을 미워하고 일본을 질투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무시하는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선교의 협력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기 전에 선교현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교 현지의 사람들은 문화와 가치관과 생활습관이 많이 다르다. 부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지닐 수도 있다.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지배하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은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나는 선교현지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지배하는 대신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품은 한 선교사의 고백을 들으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은 일이 있다. 그는 중앙 아시아 알마타에서 사역하던 신 선교사이다. 그는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서 현지인들을 품고 섬기는 자세로 선교에 임했다.

한번은 자기가 그렇게도 신임하던 고려인 신자 정 모씨가 갑자기 교회를 떠났다. 정 모씨는 교회를 떠나갈 때 신 선교사에 대한 온갖 중상 모략을 다 했다. 정 모씨가 떠난 후 고려인 교인 50여명이 모두 함께 다른 교회로 갔다. 신 선교사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며 울면서도 한 사람에게도 화를 내거나 비방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정 모씨가 갔던 다른 교회의 한인 목사의 약속이 거짓인 것이 드러났다. 정 모씨는 다시 신송태 선교사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신 선교사는 정 모씨를 향해 자기에게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다고 만류하며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그리고 50여명의 신자들도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3 동역자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교의 사역보다는 선교의 동역자를 귀하게 여기며 바라보는 따뜻한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선교사역에 지나친 열정을 혼자서 다 쏟다가 그만 동역자들을 귀하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 혼자뿐 아니라 나에게 사역의 동역자들을 붙여 주시고 그리고 현지의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사 바울은 선교사역을 혼자서 한 일이 거의 없다. 언제나 동역자들과 함께 일했고 현지 사역자들에게 사역을 넘겨주곤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요 예수님의 방침이다.

4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왜곡하며 교회분열을 조장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목회자 또는 선교사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를 시도했다. 먼저 자기 자신을 극도로 낮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린도 교회가 각각 자기의 지도자들을 높이며 그들을 추종하려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질책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며 바울은 무슨 물건이뇨?" 바울은 일부러 멸시의 의미를 나타내는 중성명사를 사용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볼로나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조금 내려가서는 자기를 가리켜 "만물의 찌끼"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자기 자신을 바울처럼 극도로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협력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낮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라고 여기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한 점을 차지하는 중요한 도구와 그릇으로 택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자기를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겸허한 자세와 동시에 자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택하여 사용하는 충성된 머슴의 한 사람이라고 보는 긍정적 믿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5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진정한 협력과 동역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이야기하실 때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신자들이 더 이상 다투거나 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연합되지 않을 수 없었고 개인주의와 지방주의와 민족주의의 죄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심하게 되었고 전도에 전력하게 되었다.

우리가 선교와 목회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루어야 할 근거와 이유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선교에 있어서 협력은 가능한가? 아니 도대체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언론인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협력이나 연합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진단한다.

어느 목사는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일치와 연합을 저해하는 두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첫째는 지도자들의 사욕이요 둘째는 개교회주의 또는 개집단주의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일치와 연합의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성령이 역사해야 하고 선각자들이 희생적으로, 실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의 가능성을 어둡게 보면서도 선교에 있어서 협력의 가능성은 조금 더 밝게 보고 싶다. 오직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어가는 선교사들이 교회나 교단이라는 조직체에 매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몸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이상적인 말을 했는지 모른다. 아니다. 지금 선교지 곳곳에서 선교의 협력이 이전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선교의 협력이 보다 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것을 주님이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선교에 아름다운 협력과 동역이 불라디보스톡과 마닐라와 몽골과 타시겐트 등등 세계 곳곳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합동신학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