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북한 선교와 중국 선교와 구 소련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북한 동포들과 조선족들과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탈북자들과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특히 조선족과 고려인 노동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전 세계가 우리의 선교의 대상이지만 시대적이고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북한과 중국과 구소련은 우리의 우선적인 선교의 대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과 조선족들과 고려인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동시에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족들과 러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21세기는 동북아의 시대라고 들 하므로 우리는 동북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동북아에 대한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선교를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선교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빌리 그레함 박사가 자주 한 말 가운데 하나는 전도는 기술도 조직도 방법도 아니고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 전도는 사람이고 선교도 사람이다. 동양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가?

첫째 누구나 만나서 친해 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인생은 만남이요 선교도 만남이라고 자주 말한다. 누구나 찾아가서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부드러운 사람이 전도의 사람이요 선교의 사람이다. 예수님은 누구나 찾아가서 만나셨다. 일부러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찾아가서 세상을 등지고 외롭게 살아가는 한 여인을 만나시기도 했다. 만나기를 거부하려는 그 여인에게 인내와 부드러움과 소박함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결국에는 그녀를 만났다. 아니 그녀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기쁨의 샘이 그녀의 배에서 솟아 흘렀다. 주님을 만난 그녀는 즉시 그렇게도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만났다. 주님을 만난 그녀는 어느새 사람을 만나서 친해질 수 있는 전도인이 된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수가성 사람들도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 전도요 선교이다. 누구나 만나서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둘째 누구나 만나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인생은 나눔이요 선교도 나눔이라고 자주 말한다. 누구나 만나서 슬픔도 기쁨도 음식도 약품도 그리고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이 전도의 사람이요 선교의 사람이다. 예수님은 우리들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셨다. 모든 것을 버리시면서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셨다. 평안도 기쁨도 살도 피도 생명도 모두 우리와 함께 나누셨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이야말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삶이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삶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었다(행2:45). 도르가는 속 옷과 겉 옷을 가난한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선교사 사도 바울의 삶이야말로 나눔의 삶이었다. 재물도 나누고 생명도 나누고 피도 나누는 나눔의 삶이었다.

김해성 목사와 이선희 전도사는 지금 외국인 노동자 특히 조선족 동포들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과 위로와 도움과 기쁨을 나누며 전도인과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누구나 만나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셋째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인생은 서로 돕는 협력과 동역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의 창조의 섭리요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양식이요 우리들의 존재 즉 몸의 구성 원리이기도 하다. 지난 십여 년 이상 세계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져 온 문제는 협력과 동역이다. 마음이 넓은 협력의 사람이 선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택하신 다음 열 두 제자들과 그리고 몇몇 여인들과 함께 전도하셨고 제자들을 전도인으로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하실 때 둘씩 짝을 지어 협력하며 전도하게 하셨다.

사도 바울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동역하며 선교했다. 1885년 부활절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선교사가 인천 항구에 도착할 때 그들은 먼저 상륙하려고 하지 않고 두 번째로 상륙하려고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넷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겸손의 사람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섬기기 위함이라고 친히 말씀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기려 하고"(막10:45). 우리가 지금까지 치중해 온 돈과 푸로젝트 위주의 선교를 지양하고 우리는 이제 현지인들과 같이 되고 현지인들과 함께 살며 현지인들을 섬기는 "성육적" 삶의 선교를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항상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과 자기의 종 된 것을 전파했다고 고백했다(고후4:5).

알마타의 신송태 선교사와 불라디보스톡의 정득수 선교사는 현지인들을 섬기는 섬김의 사역을 훌륭하게 수행해 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입을 통한 복음 선포의 선교와 함께 손과 발을 통한 복음 실천의 선교를 힘써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개신교 안에서도 "테레사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겸손의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섯째 다양한 문화매체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문화적 민감성과 수용성과 적응성을 지닌 사람이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문화적 민감성과 수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문화를 포함한 인간 존재의 모든 양식이 죄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라는 비교적 중립성을 지니고 있는 매체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여러 모양의 문화적 옷을 입고 여러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과의 접촉의 장을 마련할 수 있도록 문화적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포츠 선교, 의료 선교, 예술 선교, 전문 기술 선교는 새 시대의 효과적인 형태의 문화 선교가 될 것이다. 다양한 문화매체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문화적 민감성과 수용성과 적응성을 지닌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섯째 현지인들을 인정하고 높이고 세워줄 수 있는 아량과 겸손을 지닌 사람이다. 예수님의 선교는 제자 삼는 선교였고 제자들을 키워 일군으로 세우는 일군 세움의 선교였다. 사도 바울의 선교도 한 곳에 정착하여 그 지역의 교회를 주도하는 선교가 아니었고 여러 곳을 순회하며 그 지역의 일군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그 지역의 교회를 섬기게 하는 현지인 등용의 선교였다.

21세기의 동북아 선교는 선교사가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선교사 주도적 선교를 지양하고 현지인들이 빠른 시일 안에 복음사역을 주도하도록 현지인들을 훈련하고 현지인들의 지도력을 개발하는 토착화 선교를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이 조만간 선교지를 모두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지인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격려자와 후원자로 오래오래 남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현지인들을 인정하고 높이고 세워줄 수 있는 아량과 겸손을 지닌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교회 재건"이란 슬로간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현지인들을 무시한 현지 교회의 재건은 자칫 선교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나그네 의식을 가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선교사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한 평생 나그네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다고 했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복음의 사역자들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해서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나그네로 살지 않은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 나그네 의식은 곧 선교사의 의식이다. 초대교회의 산교는 거의 모두 흩어진 나그네들 즉 디아스포라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민족주의적 또는 교파주의적 의식에 사로 잡혀 민족주의 또는 교파주의적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람은 선교에 적합하지 않다. 아니 선교를 방해한다.

한민족은 지금 세계 각국에 흩어져서 살면서 나그네 의식 곧 디아스포라 의식을 가지며 선교사적 자격을 지니게 되었다. 다행한 일이다. 천국 본향이 아닌 다른 고향이나 왕국에 집착할 때 우리는 선교사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 나그네 의식을 가진 욕심이 없는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전도와 선교를 할 수 있는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바울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오심과 삶과 죽으심과 가심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삶의 중심적 원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함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사로잡힌 사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과 구원에 집착한 사람, 그런 사람이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