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묘비 옆의 가족들, 왼쪽부터 오형범(매제)장로, 윤광주(막내동생), 윤혜원권사

홍장학 선생은 시드니에서 진행된 추모 행사 이후 "십수 년에 걸친 윤동주 연구에 매듭을 짓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분이 있다. 윤동주 육필 사진집을 가능케 한 것 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신앙과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의 누이동생 윤혜원 권사님 내외분이 바로 그들이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참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가족

윤권사 부부와 유가족들의 온유하고 겸손한 품성은 시인의 삶을 짐작케 한다. 홍 씨는 "윤동주 시에서 전해지는 겸손과 사랑의 세계를 삶으로 보여주는 이들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 이 긴 여정에서 얻은 큰 수확이었다"고 전했다. 시드니에서도 소문난 부부의 섬김과 희생은 지인들에게 '사랑의 본'이 되고 있다.

윤 권사 내외의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지인들은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소녀 같은 감성으로 시종 웃음을 잃지 않는 윤권사님과 아내를 위해 끝없는 배려와 우스갯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오장로님의 모습은 우리가 잃어버린 참 사랑을 보여준다"고 입을 모은다.

알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시인의 자취가 세월에 풍화되지 않도록 고이 기리고 보존했다.

"난 편지 한 장도 못 쓰는 사람이니까. 아무것도 몰라. 오빠에 관련된 일들은 장로님이 도맡아 해주셨지"

윤 권사는 부군이 친족 보다 더한 사랑으로 윤동주 기리기에 일생을 바쳐 헌신한 것에 늘 감사해한다. 오 장로는 윤동주 시인의 세계를 이 세상 무엇보다 귀하게 여긴다.

불편한 몸때문에 다른 외출은 삼가도 새벽기도는 빠지는 법이 없는 이들은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장도, 왜곡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윤동주를 발견하기 원한다.

시인이 말구유 예수의 초라한 십자가를 흠모한 것처럼 진실로 자신의 몫의 십자가를 메기 위해 몸추림쳤던 시인의 삶은 이 시대 크리스천이 흠모해야 할 모습이다.

아직 세상이 시인 윤동주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그의 유가족들은 생전에 시인이 되고파 했던 시인의 뜻을 기려 무덤 앞에 '시인 윤동주'라는 묘비를 세웠다. 오 장로는 "그것이 최초로 윤동주를 시인이라고 공언한 자리였다"고 말했다.

세계적 시인의 초라한 시작을 기념하며 가족들이 남긴 사진 한장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때의 모습과 닮았다.

유가족들의 증언과 홍장학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비록 그가 살아생전 화려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지언정 신앙의 뿌리를 두고 민족에 대한 구원의 염원을 놓친 적이 없음은 분명하다.

윤동주의 신앙은 구국정신과 일치

윤동주 시인은 심지어 저항시인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의심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출생지인 북간도와 기독교의 연관성만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주장이 억측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오형범 장로는 철저한 유교 문화권이었던 북간도 땅이 하루 아침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사연을 회상하며 "불과 100년도 안된 이야기인데 이미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잊고 있으니 참..."하고 아내 윤권사와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미 송우혜 '윤동주 평전<神鉛 1998, 세계사>'에 의해 철저히 고증된 바 있지만 북간도 땅에 기독교가 정착되는 과정에는 어떠한 서구 열강의 무력도 작용하지 않았다.

1909년 경 시인의 당숙이었던 한학자 김약연 선생을 비롯한 북간도의 학자들은 나라를 잃은 국가의 재건과 구국을 위한 대안으로 신학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인재를 기르기 위해 서전서숙에 이어(북간도의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이었던 서전서숙은 설립자 이상설의 헤이그 밀사파견으로 1907년 문을 닫았다) 설립한 '명동학교'를 통해 신학문을 교육과정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과목은 개설할망정, 신학문을 교육시킬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다. 당시 마을의 학자는 유학과 한학을 공부한 구학자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애국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이자 독실한 기독교이었던 정재면 선생이 신학문 담당자로 내정됐다. 애초에 신민회로부터 '북간도를 재건하라'는 권고를 받고 북간도에 발을 들인 정재면 선생은 이미 문을 닫은 서전서숙에서 눈을 돌려 '명동학교'의 청을 수락했다.

단, 학생들에게 정규과목의 하나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명동의 지도급 유학자들은 며칠간의 논의 끝에 그의 혁명적인 조건을 받아들였다. 조용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성령의 주장하심을 따라 정재면 선생은 서서히 기독교를 북간도 땅에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실력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복음 전파에는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곧 학생들만으로는 신앙이 발전이 없다며 마을 어른들까지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한다. 이번에도 며칠간의 마을회의 끝에 북간도를 기독교의 땅으로 만들 결정이 내려졌다.

어른들까지도 예수를 믿고 예배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1909년 5, 6월의 어느 날 명동 교회는 그렇게 세워졌고 저명한 유학자들과 어른들이 가족과 함께 주의 전으로 나아왔다. 학자들은 북간도의 평화적 기독교 수용과정의 저변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횡포에서 고통당한 북간도 주민들의 사정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홍장학 선생 역시 "오장로의 증언을 통해 윤동주에게 있어 기독교는 곧 구국정신과 일맥상통한 민족 구원의 의미를 가졌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팔복,슬퍼하기만 하면 진정한 천국없다는 역설적 표현

그는 마지막으로 많은 퇴고의 흔적을 남긴 작품 '팔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며 윤동주 시인이 지향한 삶을 재확인 했다. 이 시는 '마태복음 5장 3~12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무려 8번이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반복한 후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막을 내리는 시의 의미에 대한 갖가지 해석이 있다.

홍 선생은 이 시를 "슬퍼한다는 것은 가장 소극적, 수동적인 자세이다"며 "부제에서 밝힌 마태복음 구절을 염두하고 시를 읽으라는 시인의 의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에 따르면 끝없이 퇴고한 끝에 결국 "슬퍼하는 자는 영원히 슬퍼하리라"고 마무리 지은 것에 대해 "슬퍼하기만 해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적극적으로 체험하지도 못할 뿐더러 체험한다 해도 가장 초라한 천국밖에 경험할 수 없다는 역설적 표현이다"고 해석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온유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의 삶이 그러했듯 온유와 겸손의 성품으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핍박을 견디는 삶, 그것이 바로 오늘의 크리스천이 따라야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눈으로 발견한 또다른 윤동주 시인
윤동주의 작품..기독교적·성서적 상징 풍부
믿음 따라 살다 간 크리스천 윤동주 시인
추모 60주년-십자가를 흠모한 윤동주 시인

호주 신유정 특파원 yjshin@ch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