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자신의 인간성과 종교적 신념 사이의 모순으로 심한 갈등을 느끼며, 그러면서도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 내부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던 러시아의 구도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명문 백작의 가문에서 태어난 행복과 또 다른 의미의 불행을 동시에 지닌 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여기서 '행복'이라고 한 것은 통념에 입각한 피상적인 판단과 관련된 것이고, 반면 '불행'이라고 한 것은 그의 그러한 출신 성분이 그의 삶 자체를 행복스럽게 해 줄 수만은 없었다는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좋은 가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고 한 것에 어떤 외적인 이유라도 작용했느냐 하면 전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사서 고생을 하는 그런 유형의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하여간 그는 통상적인 의미에 있어서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그는 애초엔 고귀한 귀족 출신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문학자로서의 그 자신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독자 대중이나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들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의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그의 말이나 강연은 곧[卽刻] 원고가 되어 나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이나 친지들은 왕실 사회에서 존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어느 때이거나 황제를 알현할 수도 있는 몸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지배계층의 관례에 따른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기막히게 흥청대는 생활을 즐겨도 보았던 것이다. 자연히 청소년기의 그의 담화는 지독한 음담패설에 젖어 있었으며 또한 여성들에 대한 태도가 지저분했다고 하더라도,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이상하리만큼 도덕적이고도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곤 했던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해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군 포병 장교가 되었는데, 곧 이어서 크리미아 전쟁(1853~56)이 일어났으므로 그는 이 싸움에 종군하였고, 또 이 전쟁의 모습들을 총서 형식으로 써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패배는 그들의 남하정책에 좌절을 초래했으며, 동시에 농노제 러시아 사회의 부패상과 무력함을 스스로 만천하에 폭로하게 된 셈이었다.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사망과 그에 따른 패전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 농노제의 폐지와 사회의 전반적 개혁에 대한 요구를 지속적으로 증대시켰다. 농민들은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정치 지도자들도 지금까지의 지배 형태를 계속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회의 빈곤과 참상에 커다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지주들은 그들의 특권에 대해서 인민에게 보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850년대 후반에 그는 스스로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감해 주었고, 얼마간의 토지도 나눠주었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적으로 농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같은 처지의 지주들로부터 불평과 원망을 듣는 일이 있게 되었다. 자기 땅을 제 맘대로 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드디어 새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귀족 계급을 향하여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현 농노제를 그대로 고집할 수는 없다. 농노제가 밑으로부터 폐지되기보다는 위로부터 폐지하는 것이 상책이다." 1861년 2월, 이리하여 러시아의 농노제는 폐지되고 농노들은 해방되었다.

바로 이 해 4월 톨스토이는 외국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의 영지 야스나야 폴리아나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안일을 주기 위해 땅을 경작하는 바나 다름없는 처지의 농민들에게 교육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자기 소유의 영지에 학교를 세우고 그들과 함께 하며 스스로 농민교육에 발벗고 나섬으로써 이제 그는 '농민 백작'의 신분이 된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친 루소의 교의에 지배받은 그는 이제 원시적인 간소한 생활원칙을 세우고 도시문명에 유착된 모든 것들을 배격하였다.

톨스토이는 그가 세운 이 학교에다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몸이 약해져 뜻하지 않은 질병을 얻었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부득이 사마라란 곳으로 정양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없는 동안에 경찰[헌병]이 들이닥쳐 그의 집을 수색하고 그 학교마저 폐쇄해 버렸다.
이후 그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1869)를 써냈다. 민중이야말로 역사 과정의 결정적인 힘이며, 나폴레옹과 싸워 조국을 지킨 자도 황제나 정부가 아니라 민중이라는 것이 이 작품의 기본 사상이다. 다음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1877)에서는 여주인공 안나를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위선으로 가득 찬 러시아 귀족사회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부활』(1899)은 기독교 정신이 가장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정글』이란 소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업튼 싱클레어는 이 소설을 톨스토이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러시아 청년 귀족이 자신의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서, 속죄를 받으려고 고행 길에 나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만년의 톨스토이가 이루어 놓은 기독교 신앙의 기념비적 결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집을 뛰쳐나가 어느 시골 역 앞에서 객사한 톨스토이의 생의 마지막 모습은 "자신의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서, 속죄를 받으려고 고행 길에 나선", 작품의 주인공 네플류도프의 상(像) 바로 그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영천(문학평론가, 조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