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박
1991년 박길용 前 주동독 북한대사(1959년 탈북)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평북 강계로 후퇴한 후 지도부에서 들어보니 인민군이 평양을 후퇴하던 10월 18일 밤 평양 형무소에서 5백여 명을 총살, 이들 중 조만식 등 일부 시신은 대동강변에 웅덩이를 파 가매장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해둔 채 후퇴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렇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제 선생이 돌아가신지 66년이 흘렀지만, 선생의 삶과 유산은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큰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 전 북한 지역에서 가장 인정받고, 존경받는 정치인은 단연 조만식 선생이었다.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한반도가 분할되고, 북한 지역은 소련, 남한 지역은 미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소련은 이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당시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는 전반적으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애초 소련 당국은 북한에서 '非공산주의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통해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대중의 지지도를 고려, 소련 당국은 제1순위로 조만식 선생을 북한의 '명목상의 지도자'로 고려했다고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은 2004년 그의 저서에서 기술했다.

안드레이 란코프(Andrei Lankov)도 그의 책 '스탈린에서 김일성까지: 북한정권의 수립'에서 "조만식과 다른 유명한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명망을 이용하는 것은 아주 유용해 보였다"며 "조만식 선생이 북한의 최고지도자로서 거의 확실한 후보였다"고 단언했다.

"한국의 간디"

어릴 적 선생은 날파람 명수였다. 하지만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했던 선생의 지조와 확고한 비폭력주의로 선생은 종종 간디에 비유된다. 선생은 독서를 많이 했고, 일설에는 톨스토이(비폭력운동의 지지자)를 좋아했다고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통치라는 암흑기를 보내는 동안, 선생은 우리나라의 존엄과 자결권을 위한 거대한 투쟁에 앞장섰다. 선생은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의 불씨를 뿌렸고, 3.1운동 막후공작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다 투옥됐다. 일제 말미에는 공개적으로 창씨개명에 반대했다.

선생은 독립운동 기지였던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으로 월급을 받지 않고 수 년간 헌신적으로 일했다. 오산학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1864-1930)에 의해 1907년 설립됐으며, 한국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등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생은 학생들과 같이 살았고, 직접 학교를 청소했으며, 학생들이 각자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헌신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순교한 그 유명한 주기철 목사(1897-1944)도 선생의 제자이자 민족운동의 동역자였다.

선생은 또한 국산애용 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선생은 경제 자립을 위한 민족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1922년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했다.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한 물산장려운동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물품과 우리 음식을 생산하고 애용하는 데 활력을 불어넣었고, 선생은 이 원칙을 몸소 실천하여 서양의복 착용을 거부하고 오로지 한복만 입었다.

선생은 지혜롭고, 강하고 용감했을 뿐 아니라, 겸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선생의 지도를 따랐던 것은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해서였다. 역사학자 케네스 웰스(Kenneth Wells)는 1985년 그의 에세이에서 선생이 평양에서 거주하던 곳이 "마치 소작농처럼 검소했다"는 지인의 말을 인용했다.

추후 정권을 잡게 되는 김일성은 조만식 선생을 다소 두려워했던 것 같다. 선생은 김일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선생은 김일성과 달리 소련에 추종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소련군의 약탈, 물자 탈취, 여성 겁탈 등의 만행에 대해 항의했다. 선생에게는 개인적 이득이나 권력 추구를 위해 조국과 한국민들의 안녕과 이익을 희생시킬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故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도 지적했듯, 당시 대다수 한국의 지도자들은 김일성의 '어리고 품위 없는 모습'에 전혀 감흥을 받지 못했다. 소련이 김일성을 대중 앞에 처음 등장시켰을 때, 핼버스탬은 김일성과 그의 연설에 실망한 관중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소련의 쇼였다. 김일성은 단조로운 톤으로, 소련 사람들이 써준 말을 읽어 내려갔다. 관중들이 들은 것은 한 젊은, 다소 어눌한 정치인의 '매력 없는, 오리 같은 목소리로'였다. ... 하지만 관중의 심기를 정말로 불편하게 만든 것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지나친 찬사였다. 관중들은 한국말로 표현된 자유를 듣고 싶어 그곳에 있었지만, 김일성의 연설은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복종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연설에 대해 란코프는 "한국 내 소련 출판물에 나오는 어구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고 첨언했다.

궁극적으로는 유엔 신탁통치안에 반대한 것이 선생의 즉각적인 체포로 귀결됐다. 신탁통치안은 당초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향후 5년간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한반도를 보호 관할한다는 내용이었다.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 후 신탁통치안이 처음 표면화됐을 때, 남북한 모든 지역에서 반탁시위가 일어났다. 신탁통치안은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불필요한 한반도 분단을 더 연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선생과 마찬가지로 신탁통치안을 새로운 통치자들이 한국의 예속을 영구화하기 위한 술책으로 바라보았고, 한국의 독립을 연기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것이라고 가슴 깊이 느꼈다.

이제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한국이 직면해야 했던 참상, 예컨대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중 하나였던 6.25와 우리 세대 북한에서 벌어진 가장 심각한 인권유린인 반인도죄와 집단학살을 고려할 때,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즉각적인 독립'과 '통일된 한반도 유지'라는 당시 팽배해 있던 한국민들의 정서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정당한 요구였음을 말이다.

/로버트 박(인권운동가, '북한 집단학살을 멈추기 위한 세계연대'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