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한복음 2장은 두 단락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가나의 혼인 잔치이고 또 하나는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케 하신 일이다. 이 두 번째 사건은 갈릴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그때는 유월절이었다.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은 1년에 3차례씩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서 제물을 드리고 다함께 하나님을 경배해야 했다. 그런데 성전에 가 보니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 돈 바꾸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거기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노끈을 구해다가 채찍을 만드셨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15절)” 예수님은 원래 성품이 이런 분이 아니시다. 온유하고 자비로우시고 사랑스러우시고 ,어린 아이들을 보더라도 쫓지 말라고 하시고 상한 갈대를 보더라도 꺾지 말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여기서는 참지 않으시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내 아버지의 집”. 이는 성전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이다. 아버지의 집이 교회이다.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이고 하나님의 거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나서, 이제는 하나님의 집이 교회로 바뀐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에게 강조해주는 것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생명 얻는 문제이고, 둘째는 생명을 얻은 결과이다. 최종적인 생명의 결과가 무엇인가? 자라고 자라 하나의 교회로,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분의 생명 주시는 사역의 최종적인 목적, 아버지 집을 이 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대단히 관심하고 계신다. 그래서 주님은 당시 아버지 집인 성전에 오셨다.

그런데 주님이 성전에 가 보니,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분노하셨다. 그러나 거룩한 절제가 있으셨다. 몽둥이가 아니라 노끈을 사용했으므로 짐승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몰기 위한 것이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그 자리에 쏟았으니 다시 주우면 된다. 주님은 손해는 안 보게 하셨다. 무조건 다 흩어버린 것이 아니다. 비둘기는 날아가면 찾기 어려우니 이것은 그냥 가져가라고 하셨다.

오늘날 소위 ‘의로운 분노’라고 하며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이런 절제가 있는가? 또는 자식이 잘못했다고 혼을 내는 부모들은 절제를 잘 하는가? 닥치는 대로 집어서 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히 통제된 조절된 분노로 모든 상황을 해결하셨다. 오늘날 주님이 소위 교회라는 곳에 오신다면 과연 기뻐하시면서 칭찬하실 것인가? 아니면 한쪽에서 채찍을 만들고 계시지는 않으실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돈 벌 생각을 한다. 또 성가대에서 지휘를 하고 한 달에 얼마를 받기도 한다. 오페라를 만들어서 지휘를 해서 돈을 번다면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봉사하고 돈을 벌고, 피아노 쳐주고 돈을 벌고, 소프라노를 해주고 돈을 벌고, 테너를 해주고 돈을 벌겠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앞으로 사역할 여러분들에게 말하겠는데,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성도들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직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생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힌트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누가 그런 본을 보였던가? 사도 바울인가, 디모데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진실한 주의 종들이 교회를 돈벌이 직장으로 만든 예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성전, 아버지의 집에 가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장차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피 흘리시고 구속 하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이룰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이렇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신 것 아니겠는가? 그 장사로 인해 성전 주변의 사람들이 먹고 살았다. 그러나 누군가 거기다 생계를 대고 있다면, 둘러엎어야 한다. 연보궤를 통해 몇몇 사람들이 먹고 산다면, 그것도 둘러엎어야 한다.

시장에서 염소를 팔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교회는 장사로 이득을 챙기는 곳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이득을 챙기는 자는 강도라는 것이다. 그에 관해 요한은 10장에서도 기록했다. 주님보다 먼저 온 자는 강도이고 삯꾼이라는 것이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생명을 버린다고 했다. 삯꾼은 도적이 오고 이리가 오면 양떼를 놓고 도망간다고 했다. 그의 목적은 돈 버는 것이기에 양떼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학교에 부임해 온 담임선생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전별금 받아서 인사하고 가면 그만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집이라 생각하는가? 이는 변질된 것이다. 참다운 주님의 집은 그런 곳이 아니다.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주님이 하신 일은 제자들이 보기에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대제사장 이하로 똘똘 뭉쳐 있었다. 결국 그 세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런데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시니 제자들이 놀란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한 구절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였다. 제자들은 구약의 이 말씀을 기억했다.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시 119:139). 이는 ‘내가 이미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힘을 다하였노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넘치다 보니 자기를 삼켰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많은 일들이 펼쳐져 있다. 위신도 있고 안일과 평안도 있고 안정된 직업도 있고 가족도 있고 삶도 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종들에게 혹은 사역자들에게 교회와 주님 자신이나 주님의 전을 위한 일과 경쟁이 되고 충돌이 될 때,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종들은 자기의 모든 안일과 가족 평안이나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주의 전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시 27:4, 84:10, 102:14). 이런 말씀들은 모두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장면이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를 헐었다. 지금 성전은 예수님인데,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은 이 땅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 되어서 장막을 치고 거하셨던 실제 성전이었다. 이제 이 성전이 바뀌어가는 찰나이다. 이것은 어떤 표적인가? 새로운 성전을 건립한다는 것이다. 죽고 부활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요한복음 2장은 전반부에 생명이 나오고 후반부에는 건축이 나왔다. 건축이 생명의 목표이다. 왜 주님이 생명의 사역을 하는가?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건축을 위한 것이다. 이 건축은 유기적인 생명의 건축이기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외의 것, 진리 외의 것은 ‘제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증가하는 것’이다. 그럴 때 건축되는 것이다. 신랑이 신부와 연합해 한 몸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몸의 머리로 교회와 한 몸이 되어서 그런 비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 구절의 숨겨진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고 건축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의탁하신다. 그분의 이름을 맡기실 무리가 일어나야 그분 자신을 의탁하신다. 나는 진실로 우리가 주님을 우리 가운데 모셔오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의탁할 수 있는 그런 무리가 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