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지난주에 나간 필자의 신학 칼럼 56회(역사적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칭호(1): 희랍, 헬레니즘 종교의 “신의 아들들”과의 차이)와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라는 용어 폐기를 주장하는 독자들의 제안과 토의가 있었다. 독자들의 학문적 지식과 신앙적 열정에 감명을 받는다. 이러한 토의는 바르게 믿고자 하는 신자들의 신앙과 바른 신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본(本) 신학연재 칼럼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본래 이번 주에 다루려 했던 “유대교 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II)”에 관한 글을 잠깐 미루기로 하고,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힌다.

역사적 예수(der historische Jesus, historical Jesus)란 “실재적으로 살았던 예수”(real Jesus)라는 뜻이다. 역사적 예수는 바로 복음서가 증거하는 나사렛 예수다. 역사적 예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산물이 아니고 신약학의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중요한 학문적 용어다. 역사적 예수란 복음서가 말하는대로,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셔서 가르치시고 저들과 같이 생활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실재적인 역사적인 인물인 나사렛 예수를 말한다. 필자는 이 역사적 예수가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사실이요 진실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분은 허구나 가공적 인물이 아니라 실재적인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분을 기점으로 해서 역사가 서기(西紀) 그리스도 이전(BC)과 이후(AD)로 갈라지는, 그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용(專用)어가 아니다.

1. 역사적 예수 논구의 방법

역사적 예수란 신약학 연구에서 줄곧 사용되어온 학문적 용어다. 자유주의자만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들도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는 평범한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역사적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단지 신앙의 예수만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다. 역사적 예수 용어 자체가 잘못일 수는 없다. 용어란 사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그 성격이 결정된다. 칼이 명의(名醫)에게 사용될 때 그것은 암환자를 살리는 치유의 도구가 되나, 살인자에 의하여 사용될 때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것과 같다. 엄격성을 추구하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은 학문적 논의를 회피해서는 안 되며, 진지하게 논의에 임해야 한다. 영국 아버딘(Aberdeen)대의 복음주의 신학자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은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다』(I Believe in the Historical Jesus, Regent College Publishing, 2001)라는 제목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여 “왜곡한다”고 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한 역사적 예수는 실재 역사 안에 존재하지 않고 비평적 재구성 안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예수(fabricated Jesus)다. 그러나 회피하는 것은 학문적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역사적 예수를 학문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학문적으로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되도록 증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가 파악하는 역사적 예수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이미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증언되어 있으며,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믿는 신앙인들의 인격과의 교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었으므로, 그분은 성경이나 교리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시는 구세주인 것이다.

19세기 계몽주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처음부터 신앙의 그리스도와 분리된 역사적으로 실제로 살았던 예수를 찾고자 하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양자를 분리시키고, 성경을 신뢰할 만한 경전으로 믿지 않았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로 고백된 그리스도를  넘어서,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를 찾아 보고자 하였다. 이들은 19세기 실증주의적 역사과학적 전제에 사로잡힌 시각, 즉 역사적 이성의 자율성(autonomy of historical reason)을 모든 것의 척도로 하는 그릇된 전제를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제란 인과율이라는 역사적 유추(historical analogy)에 의하여 이성적 비판이 가능한 사실만을 “역사적”이라고 간주하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계몽주의적 전제(enlightenmental hypothesis)란 기적이나 초자연적 이적(오병이어의 사건, 바다의 풍랑을 꾸짖어 잠잠하게 함, 변화산 사건, 물 위를 걸으심 등) 등 초월적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비판적 환원주의적 사고다. 그런 나머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동정녀 출생, 각종 이적, 예수의 신적 기원,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 사건 등은 내재적 역사적 인과율과 유추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신화”, “허구”, “상징” 등으로 간주되었다.

2. 계몽주의 전제에 의한 논구가 가져온 실패: 역사적 예수의 허구적 구성
 
그리하여 자유주의적 역사적 예수 논구에 있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전기 중 초역사적인 기사들은 모두 신화와 전설이나 문학적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기록 가운데 이러한 초역사적인 성격을 제거한 예수는 실증과학 이성으로 축소된 예수였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예수”(fabricated Jesus)였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역사적 예수 논구에서 재구성된 예수였다. 프랑스의 신학자 에른스트 르낭(E, Renan)은 역사적 예수에게서 “달콤한 인간주의”, 독일의 신학자 리츨(A. Titschl)은 “투철한 직업의식”, 헤르만(W. Herrman)은 “종교의식”을 발견했으며,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역사적 예수를 “묵시록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망상가”로 그렸다.

20세기에 들어와 이들의 자유주의적 비판적 사고를 그대로 수용한, 독일의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예수전』(Jesus)이라는 소저서를 내었으나 그것은 역사적 예수가 없는 예수였다. 말하자면, 그가 발견한 예수는 케리그마로만 치장되어 생애 내용이 전혀 안개에 싸여 있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어떻게 살았다는 역사적 알맹이가 없는 예수였다. 불트만과 그의 학파는 “나사렛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오심”(das Gekommen-sein Gottes in Jesus von Nazareth)만을 인정했고, 복음서에 있는 역사적 예수 기록들은 모두 초대교회가 “종교사의 신화나 전설” 같은 것을 가져다가 치장한 것으로 보았다. 불트만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케리그마 안에서 선포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이 케리그마 안에 예수가 현존해 있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202).

이러한 불트만 학파의 종교사적 논구의 부정적 영향을 극단적으로 받아 나타난 것이, 바로 1999년 영국에서 출판된 토마스 프리크(Thomas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의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라는 저서였다. 여기서 두 학자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에 의해 ‘1999년의 책’으로 선정된 바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2001년에 동아일보사에서 번역·출판되었으나 한국 교계의 항의를 받아 폐기처분되었다.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 2006)도 미국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인데, 국내에서도 출판되어 역시 베스트셀러로 팔린 바 있는,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 책이다. 더욱이 이들은 2세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영지주의 문서(도마 복음서 등)들을 가져다가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다 보니, 예수는 하나의 영지적 선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 SBS 방송 등이 2007년 방송 매체를 통하여 이슬람의 마호메트와 기독교의 예수를 비교하면서, 역사적 예수를 하나의 신화나 허구로 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기독교계 방송 언론들이 기독교가 구주로 믿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여러 가지 특집 보도를 하였다. 이에 여러 복음주의 학자들이 호응하여 글을 썼는데, 필자도 역사적 예수의 진실을 변증하기 위하여 이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라는 말은 자유주의 신학의 전유물이나 이들만의 용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용어이며 가장 친숙한 용어다. 이 용어를 사용한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주로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하여 이 용어를 저들의 것으로 넘겨주고 포기할 수는 없다. 역사적 예수란, 복음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용어가 말하는 그대로 실제로 있었던 예수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신앙하는 자의 마음 속에, 그리고 신앙의 공동체 안에,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그리고 역사와 우주의 운행 가운데 살아계시는 분이다. 이 분이 바로 역사적 예수요 바로 신앙의 예수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는 동일한 분인데 역사적 예수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3.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한 역사와 신앙의 분리

19세기 역사적 예수를 논구한 신학자들은 역설적으로 신앙을 갖지 않은 하나의 자연종교론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자연종교적인 관점에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역사비평적인 관점에서 4복음서를 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 라이마루스(Hermann Reimarus, 1694-1768)는 처음으로 자연신론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복음서 비평을 시도한 학자였다. 그는 복음서의 이적(異蹟) 사건이나 부활 사건을 하나의 “선한 동기로 인한 사기”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실제 예수와 복음서에 묘사된 교리 속의 예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스스로를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고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을 뿐,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계몽주의 신학자인 헤겔 좌파 신학자 스트라우스(David Strauss, 1808-1874)는 그의 저서 『예수의 생애』(1835)에서 이적 이야기들이 예수의 속임수에 의한 제자들의 착각으로 인한 것이라는, 합리주의 신학자 파울루스(Heinrich Paulus, 1761-1851)의 자연주의 해석의 입장을 거부하였다. 그는 대신에 구약성서에 적용된 신화적인 해석을 복음서에 적용하였다. 그는 예수의 이적 이야기들은 현대의 개념에서 하나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당연히 종교적 신화(神話)로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신약성경의 이적이란, 메시아적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라이마루스에서 시작하여 렛싱, 슈트라우스, 르낭,  슈바이처에 이르는 자유주의 계몽신학자들은 신앙적 이성이 아니라 자기들의 학문적 관념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실재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념에 의하여 채색된 예수, 즉 종말론적 세계 몰락에 대한 환상(幻想)을 지닌 허구화된 예수상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신약학자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예수를 묵시적 유대 선지자로, 그리고 세상 종말이 그의 사역 가운데 올 것(마 10:23)이라고 희망하였던 선지자로 보았다. 예수는 세상종말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하였으며 자살(自殺)을 재촉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의 간섭을 강요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랐으나,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았다. 마침내 예수는 실망에 가득하여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소리치며 죽었다. 따라서 슈바이처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세계기독교인들이 매년 사순절(四旬節)에 수난을 기념하는 대속의 죽음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슈바이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부정적으로 결론된 역사적 예수의 상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 용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전통 기독교 신자들이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 용어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상은 계몽된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예수상을 찾자고 하여 신앙과는 분리된 예수에게 붙은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역사적 예수 논구 운동은 슈바이처의 박사학위 논문을 대표적 실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운동은 후기 불트만 학파를 거쳐 오늘날에는 미국의 “예수 세미나” 운동에 이르고 있다.

4. 후기 불트만 학파의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시도

역사적 예수 용어는 위에서 언급한 자유주의 신학만이 아니라 독일 신학자 케제만(E. Käsemann)에서부터 시작하는 후기 불트만시대(postbultmann era) 학자들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kerygmatic Christ)가 갖는 역사적 기초에 대하여 논구하기 시작했다. 후기 불트만 학파의 학자들은 스승 불트만 등 전기 불트만 학파 신학자들의, 역사와 케리그마를 단절시키는 방법적 사고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케리그마와 역사의 연속성을 찾고자 하였다. 불트만의 제자들의 새로운 탐구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중요한 책들과 사상들을 낳았다.

1953년에 불트만의 제자 독일 튀빙엔대 신약학 교수 케제만(Ernst Käsemann)은 “역사적 예수의 문제”(Das Problem des historischen Jesus)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예수의 높아지심이 부활 이전의 예수 속에 어떤 발판을 갖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케제만은 결론적으로 초기 기독교가 전한 케리그마는 이 역사적 인물에 의존하고 있으며 복음서에도 그 인물을 역사적 인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케리그마 너머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다시 물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상의 예수’와 ‘부활의 주’ 사이의 연결성을 제거한다면, 초대교회의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환상설을 주장하는 가현설이나 신화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케제만은 분명히 케리그마 안에서 최소한의 진정한 예수 전승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는 이 연속성을 예수의 메시지에서 발견하는데,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반대명제(Antithese) 곧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자기를 모세의 권위 위에 세우며 모세의 율법을 상대화시키고 더욱 철저화시켰다고 본다. 케제만은 여기에서 역사적 예수와 선포된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다른 학자들도 케제만의 이러한 제의에 동의하였다.

하이델베르그대의 신약학자 본캄(Günter Bornkamm)은 케리그마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특히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와 연결성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예수에게는 유대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데, 이런 특수성에서 예수의 역사성을 발견한다. 그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의 역사와 처음 공동체의 케리그마 사이에 있는 연속성과 지상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마르부르그대의 신약학자 푹스(E. Fuchs)는 비유를 분석함으로써, 취리히의 조직신학자 에베링(G. Ebeling)은 예수의 신앙에서 그러한 지속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벨링은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모습은 신앙의 예수요, 예수의 사역과 행위에 있어서 표현된 것은 예수의 신앙이요, 이것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에벨링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말하기보다는, 나의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로서 예수를 말한다. 개인의 실존론적 의미성에 더 역점을 둠으로써, 메시아 예수는 신앙의 원천이고 근거로서만 인정되고, 이러한 한에 있어서만 신앙의 대상으로 타당하게 된다.

그러나 후기 불트만 학파들도 계몽주의적 전제를 수정하지 않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기적이나 이적 등 초자연적 기사(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주활, 승천, 재림 등)에 대하여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역사적 유추적 자율성(autonomy) 사고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등이 사실이라기보다는 신화 내지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간주됨으로써, 역사적 예수는 여전히 이러한 전제가 설정한 실존론적 이념에 의하여 왜곡되게 나타난 것이다. 후기 불트만 학파의 역사적 예수 복권은 불트만의 실존론적 협착성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여, 연속성의 발견은 각 학자들이 세운 기준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후기 불트만 학파가 제시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장은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의 불가지론을 극복해 보려는, 교회의 신앙에 부합하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적 예수가 사용한 기독론적 칭호(인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구주 등)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사용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신앙고백으로 붙인 것이라는 불트만의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역사적 예수의 복권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5. 괴팅엔 학파와 튀빙엔 학파에 의한 역사적 예수 복권의 새로운 시도

괴팅엔 신학부의 신약학자들, 유리우스 쉬니빈트(Julius Schniewind)와 유대계 여호야킴 에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후기 불트만 학파의 길이 아닌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였다. 예레미아스는 해박한 유대언어의 정통가로서 유대문서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는 역사적 예수가 말한 “바로 그대로의 어구”(ipssisima verba)는 아니더라도 “그 자신의 말”(ipssisima vox)을 찾고자 하였다. “압바”(abba)라는 말은 역사적 예수가 사용한 말로, 자기와 가장 친근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었다고 한다. 그는 역사적 예수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자신이 하늘의 “인자”로서 높아질 것을 기대했으며, 자신을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난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부활에서 제자들은 그가 하늘 왕좌에 취임과 종말의 도래를 의미하는 그의 재림을 기대하였다(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 1964, The NT Theology, 1971). 이러한 예레미아스의 역사적 예수상은 성경이 전해주는 예수상과 일치한다.

불트만 학파가 신약학계를 주도하는 가운데서도 스위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독자적으로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복권시켰다. 이러한 시도는 튀빙겐의 신약학자들, 오토 베츠(Otto Betz), 마르틴 헹겔(Martin Hengel)와 스툴마허(Peter Stuhlmacher)에 의하여 예수를 오히려 유대교적 전통에서 해석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은 신학적으로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에버딘대 신약학 교수 하워드 마샬( Howard Marshall)도 신약의 기독론의 역사적 근원은 이미 예수의 고유한 메시아적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김영한,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 의미, - 역사적 예수의 신화론화 비판 -”, 2005).

독일신학에서는 조직신학의 영역에서도 후기 불트만 학파 신약학자들이 이루지 못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권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뮌헨대 신학부의 판넨베르그와 튀빙엔대 신학부의 몰트만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구속사건과 역사”(Heilsgechehen und Geschichte)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불트만 학파의 케리그마 신학의 굴레에서 역사적 예수를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그 후에 전개된 그의 보편사 신학은 역사적 예수를 보편사의 지평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몰트만은 1965년 “희망의 신학”(Die Theologie der Hoffnung)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켰다. 따라서 1960년 대 이후의 독일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종말론으로 활성화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은 다시 현대신학의 중요한 주제도 부상한다(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제6장과 7장). 독일 함부르크대 신학부의 헬무트 틸리케(H. Thielicke)도 그의 성령론적 신학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가 성령 안에서의 신앙을 통하여 그 메시아적 실재와 구속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김영한, 『헬무트 틸리케. 종교개혁적인 성령론적 신학』, 살림, 2005).

이와는 대조적으로 198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예수 세미나” 운동은 인격적 신앙 없이 추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의 역사적 예수상과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예수 논구에 대한 회의주의를 심화시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