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2년 8월 19일
본문: 갈라디아서 5:1~12
설교: 석기현 목사
제목: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석기현 목사(경향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최근에 무슨 텔레비전 오락프로에서 어떤 개그맨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언젠가 시내버스를 탔는데 한 손으로는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배관 파이프를 보온할 때 쓰는 짙은 회색의 스티로폼 파이프를 세워서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는데 그 개그맨 곁에 서 있던 아저씨가 "어이쿠" 하면서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버스가 갑자기 제동을 하자 그 개그맨이 바닥에 세워 손으로 잡고 있던 보온용 파이프를 버스에 설치된 기둥 손잡이인 줄 알고 붙잡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장정의 몸무게를 지탱해 줄 힘이 있을 리 만무했던 스티로폼 파이프는 물론 꺾일 수밖에 없었고 그 아저씨 역시 버스 바닥에 뒹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진짜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지만 그처럼 겉모습만 파이프 비슷하게 보이는 스티로폼 파이프를 붙잡는 사람은 당연히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신앙의 '기반'이나 '손잡이'가 확실한 신자는 늘 '굳세게 서' 있을 수 있지만, 자기가 믿고 의지한다는 대상 자체가 벌써 '속이 비어 있는 스티로폼 막대기' 같은 것이면 자연히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율법주의적 이단을 공박하면서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강력하게 변증(辨證)해 왔던 사도 바울은 이제 그 결론이 시작되는 본문을 통하여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붙잡아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이단을 좇지 말고 참된 기독교 신앙을 굳게 붙잡고 든든히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을 두고 1절에서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자유"라는 단어는 원래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일컫는 보통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자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그 자유'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굳세게 서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참된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그만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실족에 빠지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교회 안에는 예나 지금이나 그처럼 신앙생활의 실족과 파선으로 유인하는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사람을 죄의 권세 아래로 속박하는 거짓 종교에 결코 현혹되지 말고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참된 신앙만을 굳게 붙잡고 서 있으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현실적으로 '굳세게 선'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꼭 붙잡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며 경계해야 할 요주의 대상은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신앙은 '신본주의(神本主義) 교리' 위에 세워지지만 이단은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에서 초래됩니다.

2절부터 4절의 말씀은 '율법주의'라는 이단 속에 나타나 있는 인본주의적인 특성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 줍니다.
기록하기를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구원의 제일 조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할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이 할례에 엉뚱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이 '구원받게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그들의 '율법주의 이단'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할례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자연히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고 아주 정곡을 찔러 비판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실로 엄청난 대속의 사역을 성취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조금도 '유익'한 일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할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의 공로'에 의거하는 신앙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것이 그처럼 '자기중심'의 인본주의적 사상으로부터 비롯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직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 보려고 발버둥치는 처절한 몸부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3절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듯이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 즉 그들이 꼼꼼하게 정리하여 세어 놓은 '613개의 조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준수해야만 할 의무에만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율법 전체'를 온전히 준수하기는커녕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기조차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처럼 순전히 인본주의 사상에서 출발한 까닭에 그 결론 역시 막다른 골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단 종교의 필연적인 인과관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인본주의적 이단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종교라는 사실이 그 최악의 문제점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4절에서 그처럼 "율법 안에서 (스스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인본주의적 종교인들도 노력은 많이 하고들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어찌하든지 '의로운 사람이 되어 보려고' 나름대로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의롭게 되고자 하는 길을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만 찾으려 할 때에 그들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 베풀어 주시는 '칭의의 은혜'로부터는 완전히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은혜'라는 단어는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 편에만 있음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도 바울이 즐겨 쓰는 단어입니다.
아무리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이라고 한다고 해도 순전히 인본주의로 시작하고 인본주의만으로 영위하는 종교에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결핍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는 종교가 실상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종교'가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본주의 종교는 어떻게 시작되는 것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 5절과 6절에서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종교입니다.
여기 '성령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성령을 통해서'(through the Spirit)입니다.
참된 종교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전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divine Spirit)의 감화감동에 의하여 처음부터 비롯되고 끝까지 주관되는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사람의 공로나 노력이라는 것들이 끼어들 여지조차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을 좇아"라는 말의 영어 번역은 'by faith'입니다.
성경은 '믿음 때문에'(because of faith)라는 표현을 전혀 쓰지 않고 오직 '믿음에 의하여' 혹은 '믿음을 따라'라고만 표현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라는 것이 일견 순전히 사람 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에 있어서는 이것 역시 사람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조차도 오직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일 뿐이라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는 말도 마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그 결과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종교를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기대와 소망도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내는 복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약속해 주신 참되고 영원한 복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말씀에도 역시 신본주의적 고백이 가득 차 있습니다.
'역사하는 믿음'이란 그저 마음속에만 있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속에 있는 믿음을 따라 밖으로 나타나는 '신행일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견 이것만큼은 정말이지 전적으로 사람 편에 달려 있는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선행조차도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먼저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사랑이 그 근거와 동기와 이유가 될 때에 비로소 사람은 제대로 '사랑의 신행일치'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철저하게 신본주의적인 종교입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조성될 때부터 시작하여 그 신앙이 유지되고 적용되는 기간과 그 신앙이 결론적으로 이루게 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과정을 통하여 구석구석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체'가 되신다는 교리는 오직 참된 기독교 신앙만이 가지고 있는 너무나 멋지고도 위대한 진리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성'을 똑바로 깨닫는 자이며 바로 여기에만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신앙고백에 대한 모든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노력하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의 공로를 세우고자 하며,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서 시작되는 종교는 결코 참된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종교의 시발점 자체부터가 사람 편에 있고 종교의 목적 역시 자연히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인본주의 종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이단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어 준다고 하는 종교가 하나님을 제쳐 놓고 사람이 주도권을 주장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소리겠습니까?
그런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람 자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속박되어 있는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종교인들만 양산해 낼 뿐인 것입니다.
진리의 성경 말씀이 이처럼 명백히 선포해 주는 대로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의 교리 위에 자신의 신앙생활을 굳게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바른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전도자'에 의하여 세워지지만 가짜 종교는 '사람을 미혹하는 교권주의자'에 의하여 퍼져갑니다.

앞에서 '바른 진리'와 '이단 사상'을 구별해 주었던 사도 바울은 이제 7절 이하에서는 '참된 전도자'와 '거짓 교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선 7절 이하 10절에서 그는 증거하기를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지금까지 "달음질을 잘 하고" 있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도들을 "막는" 즉 그 바른 신앙생활의 걸음을 방해하면서 "진리를 순종치 않게" 만들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골수 유대주의자들로서 바로 앞에 나왔던 율법주의적 이단 교리로써 신자들을 미혹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가짜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율법주의적 복음',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자신의 선행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가르치는 말은 오직 '십자가 대속의 복음으로써 택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이 결코 아닌 '이단의 권면'이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요동케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우선 바울이 강조한 '십자가의 복음',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원을 받게 되는 복음'이란 듣는 사람으로서는 즉각적인 반감을 불러일으킬 요지가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복음, 즉 사람의 치부를 파헤치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부터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원의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니 사람은 그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복음은 사람 편의 '전적 무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겠다고 자기 딴에는 애를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율법주의적 복음'은 '인본주의적 종교인'의 구미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선행으로 갚아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것 같고, 그런 구도(求道)적인 자세로 노력하면 사람도 신의 경지에 스스로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의 이단 교리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의 비위에 맞추어 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사람들에게 그런 '엉터리 권면'을 열심히 했던 동기는 더욱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율법을 강조함으로써 유대적 전통을 배경에 두고 있으며 율법에 지극히 익숙하다고 자타공인하는 자기 자신의 권위를 사람들 앞에서 더욱 높이 세우고자 했습니다.
즉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에 오히려 그 하나님 자리에 자기네가 대신 앉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인본주의적인 교권주의자들의 말을 따라가고 그들의 권위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교인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어떻게 될지는 정말 '뻔할 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에 비하여 사도 바울은 어떤 전도자였습니까?
11절과 12절에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엉터리 교리에 입각한 '권면'으로 교인의 심령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가리켜 앞서 10절 하반절에서도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베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까지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도하는 대상뿐 아니라 바로 전도자 자신 역시 결국에 가서는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을 날이 분명히 오고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까 10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마지막 심판날을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런 이단들의 허무맹랑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교회 교인들 중에서 참된 신자들은 결코 미혹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오직 "주 안에서" 확신했다고 했습니다.
즉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이단에 유혹되지 않게 끝까지 붙잡아 주실 분은 사도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바울 스스로가 굳게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더 잘 들을 것이다.'라고 계산하면서 권면하던 거짓 교사들과는 정반대로, 사도 바울은 '아무리 십자가 복음이 사람 마음에 거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택하신 백성은 이 복음 안에서 끝까지 굳세게 설 것이다.'라는 지극히 신본주의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전도자'였던 까닭에 자신이 전도하면서 "핍박을 받는" 것도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알기 쉽고 듣기 좋아하는 '할례의 복음'만 전했더라면 공연히 핍박 받을 일도 없고 "십자가의 거치는 것"도 "그쳤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도 바울은 사서 고생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게 될 그날 그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자가 되기만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 위에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교권주의자가 되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사도 바울은 오직 자기 자신부터 혹 하나님께로부터 '잘려 나가는 자'가 되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려는 종'으로 섬겼던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명령과 교훈은 제쳐 놓고 그저 '듣기 좋은 권면'만으로 카운슬링 비슷하게 하는 설교는 '택자를 부르시는 이'에게서 나온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비록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거치는' 것이 된다 할지라도 오직 '진리에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전도자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택자는 그 십자가 복음을 영접하고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주 안에서 확신'하는 신본주의 전도자만이 여러분의 신앙을 굳게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쉽게, 편하게 만들어 주려 하는 목사는 틀림없이 가짜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을 가지고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권위를 세우려 하는 것은 사실상 사이비 교주가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목사나 교인이나 전부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오고 있으니 오늘 '의인이 당하는 핍박'을 감수하고 인내하자고 가르치며 본을 보이는 전도자야말로 여러분을 굳게 세워 주는 진정한 목자인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사람 위에 올라앉으려 하는 '거짓 교사'에게 미혹당하여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서 여러분을 '진리 위에 굳게 서도록' 인도하는 전도자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나 '이단'이나 둘 다 '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교회'라는 조직은 가지고 있지만 그 내막을 따져보면 이처럼 극과 극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쪽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굳세게 서게' 해 주는 든든한 기반이지만 다른 한쪽은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이 없는 '헛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직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믿고 전파하는 '신본주의 신앙'만이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할 진리입니다.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영혼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으로 온갖 사랑과 정성과 희생을 아끼지 않고 쏟아 붇는 전도자들만이 여러분이 의지하고 따라야 할 영적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다 죄인이다'라는 성경의 정죄를 어물쩍 덮어버리고 '구도적인 자세로 신을 찾는 자는 어떤 종교를 믿고 있어도 다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따위의 소리는 어디까지나 여러분을 요동케 하고 넘어지게 만들 이단입니다.
십자가 신앙을 확실히 믿고 따르는 신자라면 당연히 '자기 십자가'의 희생과 봉사와 충성이 있어야 함을 가르치지 않고 그저 매사에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교인을 기쁘게만 해 주는 목사를 좋다고 따라가는 교인은 필연적으로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같은 기독교라 할지라도 '신본주의 기독교'가 있고 '인본주의 기독교'가 있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복음이 아직도 귀에 거슬리는 사람은 여전히 율법주의의 멍에에 매여 있는 교인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 이 복음에 진심으로 '아멘' 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신본주의 신앙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참된 성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이 이 '진리의 터' 위에, 이 '신본주의 교회' 안에 '굳세게 서' 있습니까?
자신의 신앙을 오직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지키고 자신의 생활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전도자'들과 함께 '교회 중심'으로 굳게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