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만장일치(滿場一致)’의 사전적 의미는 회의장에 모인 모든 사람의 의결이 완전히 일치함을 뜻합니다.

교회에는 당회부터 제직회, 공동의회, 남·여 선교회 등 많은 부서와 조직이 있습니다. 교회 안의 대부분 조직에서는 ‘만장일치’를 좋아하고, 이를 편리한 도구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구전 율법 해석을 문서화해 나중에 <탈무드>를 이룬 ‘미슈나(MISHNA)’에서는, 재판관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형도 무효로 정했다고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만장일치’란 공산주의, 즉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부자 같은 특수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만든 체제에서나 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만장일치’가 나올 경우 다수결의 원칙을 채택하지 않고 해당 안건을 무효로 처리한다고 합니다. 개인의 의견을 중시하고, 타인과 의견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식 덕분에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고, 이는 앞으로 발전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상대방에게 반대 의견을 내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이 확실히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열심히 머리를 써서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공부법은 ‘만장일치’를 선호하지만, 유대인에게 ‘만장일치’란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 있는가?” 하면서 오히려 의심한다고 합니다. 권력이나 물질, 이권이 들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만장일치’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위대한 경영사상가 피터 드러커도 “만장일치는 조직 건강의 위험 신호”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조직에서든 의사 결정이 ‘만장일치’로 이뤄진다면 비정상이고, 사실에 반대되는 의견과 형편에 맞는 현실부터 시작하기 쉽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도 응집력 높은 집단이 ‘만장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집단사고’입니다.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교육적·직업적 배경이어야 조직원들의 생각이 다양해지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데, 비슷한 이들이 모이다 보니 외부와 고립되고 충분한 토의도 하지 못하는 ‘조직적 사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실 때 완력으로 몰아붙이신 적이 없습니다. 늘 먼저 제자들에게 물으셨고, 제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무슨 일이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세심하게 배려하셨고, 그들의 모든 소원들을 해결하고자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갖은 모욕과 고통을 당하실 때, 주님을 위해 변론을 해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만장일치’로 소리쳤던 것을 성경을 통해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만장일치’로 소리치는 그곳에는 권력과 물질, 이권이 있었습니다.

반면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며 따랐던 무리들은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아픔을 당하실 때,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슬펐을까요?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말고 제발 놓아 달라고, 마음속 깊이 애절하게 소리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빌라도 총독이 군중들의 소리를 듣는 대신 비밀투표를 실시했더라면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힘에 부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한 표 한 표가 모여 로마 법정에서 주님께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고요한 함성을 빌라도가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미천한 필자로서는 그냥 안타까움에, 잠시 반대되는 표현을 해 보는 것일 뿐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2천 년 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만장일치’의 목소리가 만연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개탄합니다.

교회 내 모든 인사 문제는 총회법에도 반드시 투표를 하도록 했지만, 이를 묵살하고 교회 안 권력자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편리하고 간편한 방법인 ‘만장일치’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공동의회나 제직회원들 중에는 고요한 ‘다른 의견’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반드시 수렴해야 하는데도, 회무 중이나 사전에 밀실회의를 거쳐 미리 짜 놓은 각본에 의해 자연스럽게 동의 재청을 외치면서 ‘만장일치’로 안건을 통과시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권력자들은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며, 자신의 권력과 부를 통해 소리 없이 강압적 의견 행사를 하여 원하던 목적을 달성해 냅니다. 광고 시 ‘만장일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부의 모습은 참으로 듣기 민망합니다.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에게 충고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풍설을 퍼트려 매장시키기도 합니다.

왜 목사 청빙과 위임, 원로목사 추대는 ‘만장일치’로 손쉽게 통과시키는지요? 어려운 이웃과 나누며 함께하는 일에는 ‘만장일치’ 대신, 왜 그리도 시끄럽고 말이 많은지요.

목사 청빙과 위임, 원로목사 추대, 노회장·총회장 선거 시에는 사전에 충분한 검토를 하고 함께 지혜를 모아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만장일치’로 가결하려 한다면, 훗날 돌이 킬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늘 중심을 보시고, 질서를 중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고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다른 종교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조직 안에서 작은 것 하나 빠뜨림 없이 세심한 토론과 논쟁의 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찾아 보기 힘들 것입니다.

소수의 의견이라도 들어 줄 수 있는 가슴과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미래이며, 교회의 발전과 함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임을 잊지 맙시다.

‘만장일치’의 지지는 그런 지지를 받도록 행동해 온 당사자의 문제이며, 그 책임 또한 전적으로 당사자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장일치’라는 시행착오를 통해 뼈아픈 상처를 남기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 아닐까요.

추신. 특정 교회를 지칭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므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라며, 지난 시간 동안 혹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가면 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