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류재광 기자

‘한국 성결교회 인물 연구 특별 학술 세미나’가 25일 서울 우석기념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번 세미나는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박사)가 주최하고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가 주관했다.

▲박명수 교수가 대표 발표하고 있다. ⓒ류재광 기자

특히 이날 대표 발표는 박명수 교수가 ‘이명직과 동양선교회와의 관계’를 주제로 전했다.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고 동양선교회(OMS)는 성결교회를 설립한 선교부인데, 박 교수는 이들의 관계를 자치와 자립이라는 관점에서 살폈다.

박 교수는 “동양선교회는 원래 토착선교는 토착인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아울러서 새로운 지역으로 선교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기존 선교지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동시에 이명직 목사는 한국교회는 한국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았고, 단지 이것을 위해서는 한국인의 자립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와 이명직 목사는 원칙적으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이들의 시도가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지적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주도 아래 놓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 원인으로 박 교수는 △동양선교회의 일관된 정책 부재와 일방적 자립 강요 △한국성결교회 내부의 갈등과 외부(일제)의 가혹한 현실 등을 꼽았다.

박명수 교수는 “선교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토착교회에 리더십을 이양하고 자립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1930년대 벌어진 자치와 자립 운동은 결국 양측의 미숙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동양선교회는 한국을 철수하게 됐고, 한국성결교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자립해야만 했다”며 “선교사들이 없으므로 이제는 한국교회를 한국인이 치리해야 했고, 더 나아가서는 어쩔 수 없이 자립해야만 했던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이렇게 외형적으로는 선교사의 철수 후 자치와 자립을 이룬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일제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됐다”며 “그래서 예배 시에 황국신민선서를 해야만 했고, 동시에 일본군의 전투를 위해 헌금을 해야 했다. 일제는 1943년 12월 재림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한국성결교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후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한국성결교회가 동양선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동양선교회는 한국교회의 자치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그 관계를 이어나갔다며 “역설적으로 자치와 자립은 태평양전쟁이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는 1부 대표 발표와 2부 그룹별 발표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에서는 유석성 총장의 인사말과 유동선 기성 총회장의 축사 후 박명수 소장이 발표하고 박용규 박사(총신대)가 논평했다.

2부 그룹별 발표에서는 ‘정빈과 성결교회의 시작(정병식 박사)’, ‘김상준과 사중복음(박찬희 박사)’, ‘최석모와 해외선교(박문수 박사)’, ‘김응조와 사중복음(배본철 박사)’, ‘이건과 복음주의 사상(박종현 박사)’, ‘박현명과 교회 리더십(주승민 박사)’, ‘이성봉과 부흥설교(박형신 박사)’, ‘김유연과 한국의 성결운동(배덕만 박사)’, ‘정진경과 한국교회 연합운동(장금현 박사)’, ‘조종남과 서울신학대학교(박창훈 박사)’ 등을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