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억울한 시련과 고통을 당했다는 점에서 욥과 요셉은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신정론적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의 경우는 닮은 듯 전혀 다른 점이 있다. 욥의 시련이 배후에 사단이라는 악한 존재로 인한 고통의 시작이 있음을 알려 준다면, 요셉의 삶은 좀 더 악을 선으로 갚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의 삶에 닮긴 신정론적 의미를 살펴보자.

1. 악의 배후에 있는 사단(욥의 경우)

1) 귀한 선물 욥기서

도대체 의인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 혹시 욥에게도 숨겨진 무슨 큰 죄악이 있단 말인가? 욥기서의 전체에 걸쳐 지속되는 욥의 지루한 고통 앞에, 고통 회피 본능이 강한 우리 한국인들은 “혹시 내게도 이런 고난과 시련이 닥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 욥기를 제대로 정독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필요한 구절만 듬성듬성 보거나 행복하게 끝나는 마지막 장만을 기억하곤 한다. 하지만 “욥기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F. I. Anderson)이다. 참된 신앙은 비천에 처할 때에도 풍부에 처할 때에도(빌 4:12) 은혜 안에 살며 성숙한 길로 나아간다. 즉 욥기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때 참 신앙이 크게 자란다.

2) 악의 배후에 사단이 있음을 기억하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성경은 다시 한 번 악과 고통의 배후에 대해 알려 준다. 바로 인격적 존재 사단이다(욥기, 왕상 22장).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다. 욥기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욥을 가르치신 책이었다. 인과응보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가혹하고 엄청난 감당키 어려운 시련이 욥에게 일어났다. 오늘날 처처에서 일어나는 잔인하고 흉악한 살인, 처형, 강도, 홍수, 지진, 가뭄, 기아(飢餓) 등과 유사한 시련이었다.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욥의 지독한 시련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욥이 누구인가? 노아와 다니엘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 삼총사 중 한 사람이었다(겔 14: 14절, 욥기 1장 참조). 그에게 지독한 시련이 몰려왔다. 그 배후에 사단이 있었다. 그리고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욥을 아주 강하게 시험하기 시작하셨다. 욥과 친구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역사상 최고 천재들의 놀이터인 “신정론 담론”이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는 것도, 바로 악의 문제는 내재와 초월의 관계 속에서 보지 않으면 풀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임을 욥기는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3) “고통 해석”을 둘러싼 욥과 친구들의 지루한 공방전

과연 욥이란 인물이 욥의 친구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와 엘리후가 그 삶의 궤적과 행위에 대해 적당히 충고하고 권면하고 경고해도 될 만한, 그런 세속에 찌든 인물이었던가?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제시한 위로와 충고와 권고는 당연히 상식적·인과응보적 해석이었다. 친구들의 충고와 위로가 때론 신앙적이고 철학적이고 현학적이었다 해도, 그들의 고통 해석법은 고작 내재적(內在的)이고 이 세상 테두리 안에서의 해결책일 뿐이었다. 내재는 결코 초월의 것들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4) 내재의 세상에 개입하신 초월의 하나님

욥에게 닥친 이 지독한 고통의 “원인 해석”에 대해 욥과 욥 친구들 사이에 벌어진 ‘해결책 없는 공방전’은, 욥기 초반부(2장)부터 후반부(37장)까지 지루하게 이어진다. 이 공방 속에 놀랍게도 초월의 하나님은 직접 욥에게 현현(顯顯)하셨다(38장).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욥 뿐 아니라 인류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셨다. 70여 개에 달하는 그 내용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창조주 하나님께서 던지시는 자연계시적 질문이었다. 즉, 욥이 처한 형편에 해당되거나 처방이 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수사적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두 동물을 통한 클라이막스 질문’에서, 수사학적 질문의 안개와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고 본모습이 드러났다. ‘베헤못’(40장)과 ‘리워야단’(41장)이라는 두 동물을 통해 하나님이 전하시려는 논지는,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동물 가운데 최고 으뜸인 ‘베헤못’을 창조하신, 모든 세상의 창조주요 주관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리워야단’처럼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한 존재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즉 ‘두 동물’은 모든 것의 주관자요 주인이요 섭리자인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배후에 ‘교만한 (영적) 존재’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 두 가지 깨달음을 동시에 욥에게 선물하였다. 욥은 이 속사포 같은 하나님의 수사적 질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실은 얼마나 미숙하고 편협하고 속 좁은 교만한 존재였던가를 깨닫게 된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공기 한 줌 먼지 한 톨 만들지 못하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불평이 많고 인내하지 못하며 따지는 것이 많고 기고만장하였던가! 그리고 “교만한 것의 왕” 리워야단에 대해, 하나님은 또 얼마나 세밀하고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욥에게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대한 영적 비밀을 알려 주고 계신가! 욥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즉시 회개하였다(욥 42: 1-6). 참된 회개였다. 그리고 욥의 고난과 고통은 사단이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함께 영육 간에 해결되었다.

2.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요셉은 예수를 닮았는가)

1) 요셉, 절반의 그리스도(?)

시련을 당한 점에 있어 욥과 요셉은 분명 닮았으나, 많은 점에서 욥과 요셉의 경우는 정말 달랐다. 즉 신정론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욥과 요셉을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는 조금 달랐다. 요셉은 욥과 달리 예수의 모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비록 요셉이 위대한 사람이기는 하나, 그 조상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과 비교할 때 영적으로 미흡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가 어떻게 예수의 모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의 조상들처럼 언약을 받은 적도 없고, 메시야는 유다의 후손으로 오지 않았던가. 신약성경에서도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어떤 인물이기에 신정론적 어떤 모형을 그에게서 찾으려는 것인가? 모형은 결코 실체가 아니다.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나 몽학선생 같은 것이다. 요셉은 그런 존재였다. 결코 요셉을 절반(折半)의 그리스도쯤으로 보려는 유비적 사색을 하지 말아야 한다.

2) 예수의 모범을 닮은 요셉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진정 사랑하던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 요셉은, 분명 예수를 참 많이 닮은 존재였다. 요셉의 꿈과, 형들에게 당한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시련과 억울함과 오해는, 낮은 곳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예수의 삶을 연상케 하는 게 사실이다. 즉 노예로 억울하게 끌려간 애굽 땅에서 모든 환난을 딛고 형통한 사람으로서 선으로 악을 이긴 요셉은, 분명 예수의 모형(模型)을 지닌 인물이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러 애굽 땅에 들어온 형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사랑하는 막내 동생 베냐민을 보고자 했던 요셉의 마음이나, 동생 베냐민의 자루 속에 몰래 자신의 은잔을 숨겨 도둑 누명을 쓴 베냐민을 자기 곁에 두고자 했던 요셉의 ‘전략적 사랑’, 즉 세상 악의 구조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요셉의 전략적 지혜는 마치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려 달라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처절한 간청을 외면하는 듯 보였던, 예수님의 낯선 응답 방식”과 닮아 있다. 예수와 요셉 모두 결국 선으로 악을 이겼다.

노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는 신정론을 루터란 철학자였던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세계’(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위대한 방법’” 유형으로 나누었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와 죄의 악한 결과들을 모두 떠맡으셨다는 사실이,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공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신 십자가 사랑이었다. 그렇다 요셉은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모형이라기보다 예수의 모범을 닮았다고 보아야 한다.

3) 요셉을 통해 보여 주려는 두 가지

요셉은 분명 그리스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뚜렷한 모형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경의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신정론적 관점에서 그것은 분명 두 가지였다. 먼저 성경의 2930명에 달하는 실명 인물 중 그나마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요셉조차 가나안 땅이 아닌 인생의 광야(in Egypt)에서 결국 죽는다는 사실(in a coffin, 창 50장 26절)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 죽음은 모든 인간이 짊어진 마지막 징계이다. 110년을 산 요셉의 세상 시련은 사실 그리 길지 않았다(욥도 그랬다). 그리고 세속 영화는 비교적 풍성하고 복되었다. 그럼에도 요셉도 다른 인간들처럼 결국 죽었다. 믿음으로 소망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요셉은 애굽 땅에서 죽어 방부처리되었다(창 50:26). 창세기는 이렇게 그나마 예수를 가장 닮은 인물인 요셉의 죽음이라는 인류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다. 믿음 속에서 구원의 기초 작업이 끝났을 뿐이다(히 11:22). 하나님은 소망의 책 출애굽기를 통해 새로운 믿음의 인물 모세의 손을 잡고 인류 구원의 여정을 재개하신다. 두 번째로 ‘인류 대표’ 요셉이 우리들에게 전해 준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랑’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은 악과 어떤 관계인가? 사랑으로 악을 어떻게 이긴다는 것인가? 꼼수에 능한 우리 인간은 그 강력한 사랑의 원초적 힘을 다는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신정론적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한번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신앙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잡고 인생의 길을 가면서, 그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갈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요셉처럼 비록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억울함과 시기와 시련을 당하더라도, 오직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묵묵히 오르신 예수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신 십자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라!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