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회 좌담회에 참석한 ‘선배’들이 함께한 모습.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황성연·이원우·박종태·방주석·설익환·최규식·오민택 전 회장. ⓒ이대웅 기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익숙한 문장처럼,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리고 우리의 손에 들어가기까지는 참 많은 사람의 손길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영업인’들이다. 이들은 ‘책’을 온·오프라인 서점과 각 매체에 알리고, 때로는 나르며, 도서전 등을 통해 독자들과 직접 만나 소개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많은 땀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셈.

이러한 영업인들이 모여 지난 1985년 결성한 한국기독교영업인협의회(영인회)가, 30주년을 맞아 발기인 및 초창기 회장 초청 좌담회를 열었다. 이 협의회에는 현재 기독 출판사 대부분의 영업인들이 가입해 있으며, 회원 수는 80여 명이다. 영인회는 상호 우의와 친선도모 외에도 정보 교환과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자질 향상을 꾀하면서 문서선교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또 서점 등 출판 관계자들 간의 갈등에 결집된 힘으로 공동 대처하면서, 기독 출판계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차량으로 전국을 누벼야 하는 사역 특성상 안전에 대한 대책도 마련하고, 서점 부도 등의 사태에 공동 대처하기도 했다. 이들은 오는 10월 13일 오후 6시 고양 오페라 디바스에서 30주년을 맞아 홈커밍데이 행사도 열고, 30주년사도 발간한다.

영인회가 출범했던 장소 인근인 마포의 한 음식점에서 지난 9월 22일 진행된 좌담에는, 발기인 중 한 명인 방주석 소망사·베드로서원 대표(당시 기출협 사무간사)와 박종태 비전북 대표(6대 회장), 이원우 솔라피데 대표(7-8대 회장), 황성연 하늘기획 대표(10대 회장), 설익환 생명의샘 전 대표(13대 회장)가 참여했으며, 후배 세대인 오민택 홍성사 상무(22대 회장)와 최규식 아바서원 부장(23대 회장)이 진행을 맡았다. 다음은 좌담 내용.

-먼저 영인회 30주년 기념사업회 대회장이신 박종태 장로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박종태: 이번 30주년 기념사업은 지나간 세월들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멈춤’의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지만, 문서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돼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동안 다들 열심히 달려 왔을 텐데, 잠시 멈추고 지나온 30년의 발걸음을 돌아보는 것이 앞으로 30년의 방향을 올바로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30년 전 발기인 4인 중 한 분이신 방주석 장로님께서 당시 상황을 좀 회고해 주십시오.

방주석: 당시 저는 한국기독교출판협회(기출협) 간사였는데, 회원사가 50-60곳 정도였고 이들 대부분에 영업부가 있었습니다. 그땐 영업부가 배송까지 책임져야 해서, 배송과 수금에 마케팅까지 동시에 맡았습니다. 영업인회가 만들어지기 2년 전인 1984년 편집인회가 구성돼 세미나도 하고 있었지요.

그 모임에 종종 참석하면서, 영업인들의 모임이 없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석만 당시 소망사 영업부장님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영업인회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이후 마포에 있던 양서각 최윤덕 영업부장님 사무실로 건너가서 의견을 물었더니 좋다고 했고, 근처에 있던 설규식 당시 성광문화사 영업부장님도 불러서 의논해 보기로 했습니다. 4명이 모여 구성을 논의할 요량이었는데 거기서 바로 구성하게 되었고, 4명은 발기인이 되고 회장까지 정했습니다. 당시 기출협 회장이 소망사여서, 이석만 장로님이 회장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봄이었는데, 이후 다니는 곳마다 영업부장님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가을에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열 때는 회원사가 이미 20여 곳이나 확보된 상태였습니다.

-지금부터는 20-30년 전 영업인들의 고충과 애환 등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박종태: (물류사인) 소망배본이 1991년 세워졌는데, 그 전까지는 영업과 배송을 동시에 해야 했습니다. 제가 처음 발을 들인 기독 출판사는 목회자료사였는데, 차가 없어 여성 경리와 함께 양쪽에 책 묶음 두 덩어리씩을 들고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서 있다 내리막에서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책이 데굴데굴 굴러 앞쪽 탑승문 계단 아래로 떨어져 끄집어내지도 못하고 난처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 함께했던 경리가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웃음).

황성연: 말씀하신 것처럼 물류회사가 생겨서 배송 부문이 확실히 분리되면서 영업이 전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책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큰 변화였습니다.

박종태: 물류회사가 생기기 전에는 지방 출장을 위해 토요일 저녁에 봉고차에 짐을 가득 실어 놓고, 월요일 새벽부터 떠났습니다. 경기 평택부터 시작해 수원, 천안, 대전을 거쳐 전라도로 내려갑니다. 이후 경상남도로 넘어가 경상북도, 강원도로 해서 서울에 다시 올라오면 토요일 늦은 밤이었습니다. 가져간 책들을 모두 팔고 오는 것이었지요. 장기계산서를 끊어 놓고 수금을 해 가면서 영업했던 기억들이 많이 납니다. 물론 힘들었지만, 그때는 책이 매우 잘나가서 재미가 있었습니다. 대신 월급이 박해서 많이 어려웠습니다.

이후 1988년 홍성사에 입사해 6년간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홍성사에 있을 때도 보람이 있었고, 그때 영인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사실 전기 자격증이 있었지만, 주일을 지킬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군 제대 후 복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리어카를 끌고 노점상을 하다 출판사로 가게 됐지만, 후회해 본 적이 없었고 이 일이 좋았습니다. 다른 에피소드들도 많지만, 다른 분들께 기회를 드리지요(웃음).

이원우: 저는 1988년 1월 규장 여운학 장로님과 독자와 출판인으로 관계해 왔는데, 제가 퇴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판계에 와서 일해 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문서선교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직업이라는 생각에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결혼도 한 상태여서 생활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스카우트 제의가 있어 사직서를 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기도하는 중 임마누엘출판사 영업부장 제의가 들어와 1989년 1월에 입사했는데, 영업부장에서 한 달도 안 돼 제작부장까지 맡았습니다. 영인회에 참여한 후, 1991년 발생했던 서울 영등포 한 대형 기독서점의 부도에 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위원장을 맡아 서점 앞 다방에서 대책위원회 모임을 하면서 채권단 회의도 몇 차례 진행했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부도가 났던 서점을 살려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대책비를 받았습니다. 전에는 부도가 발생해도 규모가 크지 않고 거래 회원 수도 적어서 자체적으로 처리했지만, 그 서점은 너무 규모가 커서 영업인회가 기출협과 협의 아래 대책위를 만들어 잘 처리했습니다. 그 서점은 결국 끝까지 살아남진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회장을 맡았던 1992-1993년에도 대형 서점 부도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경기 지역 한 서점의 부도 사건도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안양 엔테베 작전’이라고, 휴대전화도 SNS도 없던 시절에 영업인회 중심으로 발 빠르게 정보를 공유해서 날을 정해 밤 12시에 그 서점에서 만나 각사의 책을 꺼냈습니다. 잔고와 출판사명을 다 확인하고 끝냈더니 새벽 5시가 되어 날이 밝아 왔습니다.

회장에 연임한 1993년, 최초로 영업인들의 소식지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기억이 맞다면 사륙배판 8페이지, 접지 중철의 계간지였습니다. 제호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 영업인들의 자기 정체성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제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크리스천 영업인’으로 했습니다.

황성연: 저도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주일을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검수받고 설비받고 시연을 해 주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빠질 때는 눈물이 났지만, 두세 번 그러다 보니 눈물도 말라 버렸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갈등이 생겼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영등포 대형 기독서점에서 영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는 1995년에 회장을 했는데, 당시 영업인회에서 세미나도 하고, 최종훈 번역가를 초청해 영어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어휘 중심으로 공부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어마어마한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물류센터를 점령한다는 말들이 있어 우리도 대비하는 차원에서 하늘기획과 온누리, 미스바 등이 출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국 출장이 잦은 영업인들을 위해 보험을 들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소식지를 발간할 때여서, 광고를 모아 남는 돈을 모두 적금으로 부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사망하는 사고가 나면서 대책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방주석: 베드로서원 영업인이 출장 중 사망하면서 영업인들을 위한 보험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고, 황 대표님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이후부터 영인회에서 절반, 각 회사에서 절반씩 부담해 영업인들에게 사고에 대비한 보험을 들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원우 회장님 때부터 기출협 회장배 체육대회를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트로피를 만든 기억이 납니다.

박종태: 한기호 소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1회는 꽃동산교회 기도원, 2회는 왕십리교회 기도원에서였습니다. 신앙과 영업의 질적 향상을 위해 세미나를 열고 체 력단련도 하면서 사명의식도 고취시키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월급은 적었지만 사명의식으로 영업에 뛰어든 분들이 많았고, 지금도 계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설익환: 세미나는 호응이 좋았는데, 문제는 체육대회를 하다 보면 중간에 영업하러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는 일이 생겼습니다(웃음). 그래서 아예 체육대회를 남이섬에 가서 하기 시작했지요. 용품사들이 참석하지 못해 ‘출판’이라는 단어를 떼내고 ‘한국기독교영업인협의회’로 바꾼 기억이 납니다.

부도 사건 등으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영업인회가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영업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차를 2년 이상 타지 못했습니다. 경상도까지 출장을 가면 4박 5일간 1,500km를 달려야 했으니까요. 한 달 중 21일간 출장을 간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엔 아내보다 영업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지냈고, 영업하다 죽으면 ‘순교’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 성장하던 시절, 저희 영업인들이 성도님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고 저는 지금도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후배 영업인들도 그런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보험 이야기가 나왔는데, 베드로서원 영업인 소식을 듣고 저희 영업인들이 모두 논산에 내려가지 않았습니까. 영안실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보험을 시작했는데, 어느 날 보험회사도 바뀌고 없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혜택을 입은 분도 별로 없이 그렇게 됐는데, 보험이 없어지고 나서 몇 분이 돌아가셔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전임 회장님들이 이러한 전통을 만들어 주셔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인회 ‘백전노장’들이 ‘식탁교제’와 함께 좌담회를 갖고 있는 모습. ⓒ이대웅 기자

-다른 분들도 후배 영업인들에게 한 말씀씩 부탁드립니다.

박종태: 분명한 점은 영업인들이 문서선교의 ‘첨병’이라는 것입니다. 최일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라고 생각합니다. 기독 출판계가 재정적으로 굉장히 열악하지만, 각자 사명의식을 갖고 복음을 나르는 ‘전령사’ 역할을 끝까지 잘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생활의 질도 향상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합니다. 늘 빠듯하게 살아가는데, 어렵고 힘들지만 힘을 내고 자부심을 갖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원우: 후배 영업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했으면 합니다. ‘영업인인데, 누구냐? 어떤 영업인이냐? 무엇을 파는 영업인이냐? 세상 사람들이 다들 자신의 재능과 상품을 파는데, 우리는 무엇을 팔 것인가?’를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과 복음이 들어간 책들을 파는 것이겠지요. 크리스천 영업인들에게 주어진 문서선교의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인적 사명과 잘 조화되어야 하겠습니다.

황성연: 하나님을 중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영업인 동기들을 바라보면, 주일을 잘 지켜서 모두 복을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 와서 받았던 신선한 도전들이, 후배 영업인들에게도 도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어렵고 힘들 때 영업인회를 통해 서로 힘이 되는 관계들이 소중하게 잘 흘러갔으면 합니다.

영업인 선배들이 일본 출판사들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일본 출판사들의 2세가 없어져 다 끊기고 말았습니다. 후배 영업인들이 출판계의 허리가 되어 차세대 한국 기독교 출판을 이끄는 리더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영인회의 산 증인이신 방주석 장로님께 마무리 발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주석: 30년 전 이 근처에서 발기인 모임을 가졌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흘렀네요. 30년간 영업인으로 시작하신 분들이 나름대로 다들 잘 정착하신 것을 봅니다. 크든 작든 여러 출판사들을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도 이러한 모습이 이어져 30년 후에도 이런 모습으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여기 이분들도 결코 혼자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혼자 숲을 이룰 수 없듯, 여기 대표님이 되신 분들이 서로 나무가 되어 숲을 이뤄 한국 기독교 출판계가 나름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후배들도 ‘나만을 위한 일’보다는 ‘서로, 더불어, 같이’ 출판계의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고 정보를 나누고 함께 공부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후배들이 소망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 또 다른 숲을 이뤄 30년 후에도 기독교 출판 영업 분야가 왕성하고 활발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