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살아가는 동안 일부러 실패할 필요는 없다. 실패는 인생에 많은 아픔과 부작용을 가져오니까. 더구나 치명적인 실패는 다시 일어서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까지 몰고 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실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어리석다. 인간은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까. 머지않아 실패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될 뿐이니까. 그러니 실패하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실패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패를 분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실패를 분석한다는 건 자신을 정확히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미화·보호하고 싶어한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서 찾고 싶어하지, 자신에게서 찾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실패를 분석하는 게 어렵다는 말이다.

설령 실패하면 어떤가? 실패 다음에는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는데. 새롭게 마음을 다잡아 새롭게 출발하면 되지. 중요한 건 여간해서 포기하지 않는 자세이다.

우물을 잘 파는 한 업자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한 곳에서도 그는 곧잘 우물을 파냈다.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신기하게 여겼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우물을 그렇게 잘 파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우물업자가 대답했다. “예, 나는 우물을 파는 데 실패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실패한 곳에 잘 불려 다닙니다. 우물을 잘 파는 비결은 꼭 하나입니다. 나는 아무 곳이나 파지만 물이 나올 때까지 팝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섣불리 실패라고 단정 짓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실패라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하는 끈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유전 하나를 발견하는 데 스물대여섯 번의 탐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새로운 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도 평균 1만 2000번의 실패를 거쳐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럴 수 있다. 수없는 실패를 겪어도 쉽사리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게 있다. 실패를 성공으로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실패가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순간, 나는 실패의 나락으로 곤두박질할 수밖에 없다. 승리를 향한 완전정복 참고서보다, 실패에 대한 완전정복 참고서가 필요하다.

실패를 정복하려면, 승리를 너무 예찬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아무 때나 다 승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실패 예찬론이 실패를 만들 수 있다. 실패가 다 실패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더구나 사람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승리할 수 있다.

실패를 정복하려면, 인간의 실패는 또 다른 배움의 기회임을 명심해야 한다. 실패 없이 배우면 더 좋겠지만, 실패를 통해서 배워도 그렇게 늦은 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게 있다. 실패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영적 거장들은 실패를 안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줄 알았다. 하나님을 만날 때 그는 새로운 변화를 향해 도전했다. 새로운 삶이 그에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일하기보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는 눈이 열렸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동족을 돌아볼 생각이 들었다. 평소 늘 어머니에게서 히브리인의 정체성에 대해 교육받아 온 바다. 이제는 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히브리 백성들이 일하는 공사 현장으로 나가 봤다. 애굽의 공사 감독관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동족을 보았다.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애굽의 감독관을 쳐 죽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모래를 파고 그곳에 매장해 버렸다. 완전범죄로 끝나길 바랐다.

다음 날 그는 사건 현장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늘은 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속상한 모세는 개입했다. 시시비비를 가렸다.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나무랐다. 그랬더니 잘못한 사람이 모세를 향해 대들었다. “누가 당신은 우리의 재판관이나 통치자로 삼았느냐?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 하느냐?”

모세는 당황했다. ‘아차, 모든 게 들통 나겠구나.’ 정말 들통 나고 말았다. 애굽의 바로 왕이 알았다. 바로 왕은 모세를 죽이기 위해 찾았다. 결국 모세는 또 다른 힘 때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모세의 지나친 자기 과신이 실패를 가져 왔다. 자기 권력, 힘, 능력을 과신하다 보니, 하나님께 묻는 걸 등한시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 했다. 자기 열심이 오히려 실패를 낳고 말았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실패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새롭게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세가 실패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실패한 게 아님을.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새롭게 훈련시키길 원하셨다.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세우길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의 궁중 교육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 훈련을 시키셨다.

모세가 동족에게서 거절당할 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인생에 거절은 쉽사리 경험하는 일 아닌가? 거절당함에 너무 상심하지 말아야 한다. 분노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거절당하면 또다시 도전하면 된다.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된다.

중요한 건 당위성을 붙잡는 일이다. 당위성만 분명하다면 방법이야 다양할 수 있으니까.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성취의 맛을 즐기는 순간이 다가올 수 있다. 조급함이 문제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실패한 것처럼 생각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를 성공으로 만드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열매를 맺었다. 실패한 제자들을 통해 천국 복음은 계속 확장되었다. 하나님나라는 한때 실패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계속 전진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너무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실패의 현장에서 필요한 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당신의 응원의 박수와 격려이다. 책망과 비난은 더 큰 실패의 수렁으로 떠미는 잔인한 짓이다. 실패의 늪에다가 디딤돌을 하나둘 던져 주라. 그 디딤돌이 새로운 일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