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말의 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 중에 가장 위대한 모습은 하나님처럼 말 할 수 있다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음을 받는 즉시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말은 인간이 만물 중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인간은 말을 잘못 사용해서 하나님께 반역하고 마귀의 꾐에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6천 가지 이상의 언어가 존재합니다. 이 중에 1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만 해도 무려 250개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가 다르면,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오해와 갈등이 생기는가 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을 말씀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말씀이고 둘이 하나가 되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은 그렇게 위대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말씀이고 말씀이 나다. 말씀과 나는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 만물이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라는 것은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2. 바벨탑과 혼잡한 언어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이 하나님은 반역하고 죄가 관영해서 노아의 여덟 식구 제외하고 난 다음 다 홍수로 죽게 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그 비극을 지나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나와서 인구가 여러 날 지상에 덮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후손들이 나와서 잘 살게 됐습니다. 왜 잘살게 됐냐? 홍수가 일어나서 온 지구가 물에 잠겼기 때문에 땅이 굉장히 비옥해졌습니다. 곡식이 안 되는 땅도 홍수가 한번 그 땅을 지나가면 땅이 굉장히 비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농사가 얼마나 잘됐던지 노아는 옛날 것으로 생각하고 포도원을 지었는데 포도 열매가 굉장히 많이 열렸어요. 그래서 얼씨구나 좋다고 포도열매를 진하게 짜서 마셨습니다.

노아 홍수 전에는 술이 없었습니다. 포도가 발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가 지나고 난 다음에 발효가 됐다는 사실을 노아는 몰랐습니다. 그냥 옛날 옛날 포도 그대로 준다고 포도를 잔뜩 담아서 마시고난 다음에 취해버렸습니다. 점잖게 취했으면 괜찮은데 아랫목에 들어가서 발가벗고 드러누웠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아들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셈, 함, 야벳인데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가 발가벗고 누운 것을 보고 그냥 옷 갖다 덮어 주었으면 될 거인데 밖에 나와서, “알레꼴레~ 아버지가 발가벗었다. 오너라. 아버지 발가벗은 모습을 구경하자.”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가 발가벗었으니 우리가 그것을 흉볼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지켜줘야겠다. 아버지 옷을 들고서 아버지를 안 보려고 뒷걸음질해서 들어갔어요. 그런 효성스러운 아들들 처음 봤어요. 그래서 옷을 입혔는데 노아가 나중에 깨어나서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지라. 아들들에게 복을 줄 때, 셈에게는 종교를, 야벳에게는 기계문명을, 함에게는 육체노동을 하도록 그렇게 정해주었던 것입니다.

여하간 그들이 시날 땅에 나왔는데 땅이 굉장히 기름져서 곡식이 잘 돼요. 먹을 양식이 풍부해지니까 반역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받들어야 될 것인데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되니까, 야 우리 다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물로써 죽게 못하게 만들자. 우리 도시를 건설하되 큰 탑을 세워서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비를 주셔서 우리는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동등하자. 아주 무시무시한 반역을 또 행했었습니다.

사람은 성경에 보면 잘 살게 되면 꼭 하나님께 반역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벽돌을 굽고 역청으로서 시멘트를 삼아서 탑을 쌓아 올라가는데 굉장한 규모로서 탑을 쌓아 올라갔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시고 이놈들이 또 반역해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 하나님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니까 이놈들 지상에 흩어버리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내려가서 그 탑을 세우는 것을 보자.

그 성경에는 하나님이 내가 내려가서 그렇게 말 안했습니다. 우리가 내려가서. 그 하나님, 어떻게 많기에 우리가 되나? 그건 그때부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사람을 만들 때도 우리 모양,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 명 아닙니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가서 이들에게 언어를 혼잡케 해서 여기서 탑을 세우지 못하게 하자. 그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와서 언어를 혼잡케 했습니다. 그게 바벨입니다. 위에서 돌멩이 올려라 하는데 흙더미를 올리고 시멘트를 올리라. 하는데 돌멩이를 올리고. 말이 안 통하고 서로 사인이 맞지 않으니까 건축을 할 수 없습니다.

요사이도 한가집니다. 우리가 평양에 조용기 심장병원을 세우기로 하고 우리 아시아나기를 전세내서 평양까지 가서 그 교회를 들어가서 예배도 보고 그 다음에 집을 지었는데, 아 이~ 병원 하나 짓는 것이 10년이 넘게 걸립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여기서 재료를 올려 보내줘야 그것을 받아가지고 짓는데 북한하고 말이 안 통해요. 돈을 올려 달라는데 우린 돈을 못 올려주고, 재료를 달라 하는데 재료를 주니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래서 지금 평양에 가면 벽돌로서 허물만 쌓아놓은 괴상한 건물이 서있습니다. 언제 그것이 완성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말이 서로 통통하지 않으면 일이 안돼요.

바벨탑도 서로 말이 통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말을 어지럽게 해버렸기 때문에 말이 통화 안 되므로 성을 쌓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늘에 닿는 탑을 건설하려고 하고 자기들 이름을 내고 지면에 하나님이 흩어져라 하지만은 흩어지지 말고 모여서 살자고 했는데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할 때 말이 동일하게 통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창세기 11장 6절로 9절에 보면 ‘야훼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야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야훼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야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말이 다르면 함께 살 수가 없어요.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혼잡하게 되니 서로 통하지 않고,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마음에 오해가 되어도 오해를 풀지 못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말이 같아야 되고 사상이 같아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방언도 하고 기사와 이적도 일어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그 면에서 마음이 일치가 되고 말이 일치가 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한번 오고 난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 충만을 받고 십자가를 통해서 병이 낫고 그 다음 가난이 사라지고 부요하게 되고 또 천당 갔는데 틀림없이 며칠 후 며칠 후 예수님이 함께 재림할 것을 우리가 믿고 그것을 시범적으로 다 일치가 되니까 한번 오면 안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큰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에 오면 그 다음에는 찰싹 들어붙는단 말입니다. 그게 고마운 일인 것입니다. 그냥 왔다가 떠나가 버리고 떠나가 버리면 교회가 안 되지요. 여러분, 우리 요사이 나라가 개방되어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국제결혼을 합니다. 결혼이 쉽지 싶어서 서로 눈만 맞으면 결혼을 해버리는데 그 뒤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한국 민족으로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그러고 가정을 이루어도 다른 말 합니다. 부부 간에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남편과 아내가 똑같은 말을 안 하고 다른 말을 하면 그 다음엔 주먹이 나르고 문제가 고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해 우리 한국에서 국제결혼을 할 때, 외국인 배우자가 기초적인 한국말을 하지 못하면 입국할 수 없도록 법이 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한국말을 몰라서 입국이 불허가 된 외국인 배우자가 1천 명이 됩니다. 천 명의 아내가 결혼해서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그들은 자기 고향에 남아 있습니다. 한국말 못하면 못 와요.

그런데 정부가 이렇게 법을 바꾼 이유는, 부부라도 서로 간에 말이 안 통하니까, 가정 폭력이 빈번하고, 또 이혼하는 사례가 한해 1만 건이 넘습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말을 하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 부부가 이렇게 많은데 우리와 말이 안 통하는 외국 부부가 좋은 가정을 이루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인해 영이 죽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서 소통이 안 되니까, 육신에 질병이 다가오고, 환경에 저주가 다가오고, 죽음과 멸망이 다가오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습니다.

3. 창조적 말은 변화와 창조를 가져오는 원료이다

창조적인 말은 변화와 창조를 가져오는 원료가 되는 것입니다. 말의 힘을 보여주는 두 가지 실험이 있습니다.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 박사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으로써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 책에서 보면 물과 관련된 놀라운 실험을 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물에게 말을 들려주고 글씨를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었을 때 물의 반응을 어떻게 하는가? 연구를 했습니다.

물은 우리말에 반응이 없는 줄 알았지요. 그 물에게 말을 들려주고 글씨를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그때 물이 반응을 하는지 시험을 해보니까 한 컵의 물에는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들려주고, 다른 컵의 물에는 “짜증나네” 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얼음이 되게 얼게 만들어서 결정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까, “고맙습니다” 라고 말을 들려준 물은 아름다운 육각수의 결정체를 이루었습니다. “짜증나네” 와 같은 말을 들려준 물은 결정체는 보기 싫게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똑같은 물인데 두 컵에 한 컵은, 사랑한다. 이쁘다. 좋다. 그런데 아주 물의 육각형 형태가 아름답게 보존됐는데, 짜증난다. 밉다. 더럽다. 싫다. 그렇게 욕을 해준 물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결정체가 형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세히 보면 물주머니입니다. 여러분 60%가 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말을 할 때, 여러분의 몸속에 있는 물들이 좋은 말을 듣지 않으면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몸에 병이 드는 것입니다. 세포가 이지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잘하고 서로 긍정적이 되면 병이 낫습니다. 몸에 있는 물이 치료가 되고 좋게 배열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방송사에서 말에 관한 실험을 했습니다. 막 지은 밥을 두 군데 담아서 한 달 동안 한 쪽의 밥그릇은 보고 “고맙습니다, 사랑해, 감사합니다” 같은 좋은 말을 하고, 다른 한쪽에 있는 짜증 밥그릇은 보고 “짜증나, 미워, 보기 싫어” 같은 이 같은 듣기 싫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 비교해 보았더니 “고맙습니다, 사랑해, 감사합니다” 같은 좋은 말을 들은 밥은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나고, 뽀얗게 하얀 색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반면, “짜증나, 미워, 보기 싫어” 같은 듣기 싫은 말을 들은 밥은 악취가 나고, 시커멓게 썩은 곰팡이가 가득 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이 있습니다. 그 물이 말을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이 그 배후에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말에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24절에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 이건 그냥 지나가는 말로 들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면 꿀 송이 같이 영혼이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고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 뼈에 양약이 되니까 요사이 관절염, 신경통 앓는 사람들, 허리 나쁜 사람들 아주 좋은 말을 CD에 담겨서 틀어놓고 늘 듣고 있으면 그것이 씻겨진 듯이 낫는다고요. 잠언서 15장 4절에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면 생명나무니까 생명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생명이, 그러나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 마음을 병들게 한다고.

그러므로 우리가 실질적인 양약이나 한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천국 약을 먹는데 천국 약은 여러분 입술에서 나오는 말인 것입니다. 말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3장 9절로 10절에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잡히게 되었다(잠언 6장2절)’.

우리는 여태까지 말을 하고 지나가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를 얽어매고 그렇지 않으면 자유와 해방을 주고 우리의 삶에 굉장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0절로 21절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배가 부르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하고 잘살기도 못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에 굉장히 조심을 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될 것 아닙니까?

말을 잘 하면 잘살게 되고, 말을 잘못하면 못살게 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아주 듣기 좋지 않습니까? 그걸 들으면 좋아지거든요. 어떤 자매님이 하도 일이 안되고 어려우니까 늘 원망, 불평, 탄식을 했다. 그러다가 자기가 마음에 결심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기로 작정을 하고 자기의 긍정적인 말을 CD에 담아서 곁에 두고서 하루에 5시간 이상 자기를 격려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는 이뻐, 너는 힘있어, 너는 잘해, 훌륭해, 너는 망하지 않는다, 너는 축복받는다.” 그때부터 그 생이 달라졌어요. 하는 일마다 일이 잘 풀리고 해서 나머지 일꾼도 안 안됐던 사람이 지금은 상당히 재산을 모은 사장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하는 것 우리가 조심해서 해야 돼는 것입니다.

4. 말로써 치료와 건강을 받고, 말로써 환경에 평안과 번영을 갖고 온다

말로써 치료와 건강을 받고, 말로써 환경에 평안과 번영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을 할 때,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야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만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이 내 귀에 들려야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나님이 당신을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고 했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이 맹세를 했어요. 너가 말을 한 것이 내 귀에 들리면 나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다. 그러니 잘못된 말을 하면 하나님이 잘못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긍정적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이제는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이 우리 성공, 실패를 가늠하는 일인 것을 사람들이 이제 깨닫고 난 다음 요사이는 말사용을 주의를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이 더 좋다고 하니까, 요즘은 안내 문구에도 부정적인 단어를 쓰지 않고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씁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강변 산책길에 있는 간판에 ‘낚시 금지’ 전에는 그렇게 썼더니 이제는 말 대신 ‘물고기 안전지대’라. 그 말이 물고기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또 어느 식당에서는 ‘흡연 금지’라는 말 대신에 ‘100세 이상 흡연 가능’ 사람들이 긍정적인 말을 씁니다. 참 재미있고 기발한 생각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더 따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을 분석하면 이혼도 예측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교 하버드협상연구소에서 특별한 실험을 했는데, 신혼부부의 말을 분석하여 그들이 이혼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데 기적적인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실험은 간단했습니다. 신혼부부들에게 최근에 함께 겪었던 갈등에 대해 몇 분간 얘기해 달라고 한 후 그들의 대화를 분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 결과가 놀라웠습니다. 서로 간에 오고 가는 말을 단 30초만 분석해도 결혼생활을 지속할지, 이혼할는지, 90퍼센트 정도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지속적인 부부의 경우는 비방의 말과 인정의 말이 1대 5였습니다. 즉 비방하는 말을 1번 했다면, 인정하는 말은 5번 합니다. 그런 경우는 결혼생활이 유지될 것이란 것입니다. 반면에, 이혼이 예측된 부부들은 (아첨하는 말을) 인정하는 말을 1번 했다면, 비방 하는 말은 5번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아예 안 하고 사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을 하다보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을 5번 하고 비난하는 것을 1번 하는 가정은 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은 1번하고 비난은 5번 하면 그 가정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하면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말을 많이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좀 절제해서 인정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참 좋지요.

일본에 농사의 명인 미야카와씨는 벼가 모판에서 싹을 낼 때, 매일매일 벼논에 가서 “쑥쑥 크게 자라야 한다. 잘 자라야 한다.” 그렇게 정성어린 말을 해주면 벼 이삭 하나에 보통 100알이 열리는데, 400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말만 해주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마가복음 9장23절)’고, 이는 말의 힘을 우리가 믿고 나가면 이 말이 우리에게 굉장한 도움을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13절)’.

우리는 혼자 말을 많이 합니다. 상대가 없어도 혼자서 “아유~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다. 오늘은 일이 잘못 될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을 하면 그 말이 그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혼잣말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지에 실린 기사에 보면 혼잣말도 큰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혼잣말은 사고의 한 부분으로 자기 자신의 대화를 하면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내. 해보자. 할 수 있어.” 이렇게 혼잣말로 자기 자신을 응원하면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난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 ‘너’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조용기 넌 할 수 있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효과를 옛날부터 보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하고 산책을 한다든지 운동을 하러가서 내가 못 따라갈 지경이 되면 “조용기 너는 힘이 있어. 하나님 성령께서 너와 같이 한다! 너는 피곤치 않다. 조용기 너는 튼튼하다!” 자기가 자기보고 말하는데 굉장한 효과가 있어서 튼튼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보고 “피곤하겠습니다. 나이도 있고 그런데 과격하게 운동하면 피곤하면 안 되지 않아요?”그러면 그 소리 듣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내 속으로 “피곤하기는 뭐가 피곤해! 조용기 너는 예수님이 너의 속에 계시니 부활의 생명이 너에게 넘쳐오므로 안 피곤하다. 까딱없다!”

근데 사실 자고 나면 까딱없거든요. 요사이 제 제자들이 저만 보면 왜 얼굴이 그렇게 좋아졌느냐, 생기가 요사이 난다고. 그러면 내가 나를 응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운동을 할 때도 우리 대표선수가 나가면 우리가 응원을 많이 해 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이 응원을 안 하면 누가 응원을 합니까? 여러분이 매일 같이 응원을 하십시오. “나는 피곤하지 않다. 나는 병 안 든다. 나는 음식도 잘 먹는다. 사업이 잘 된다. 좋은 일이 내게 일어난다!” 자기가 자기를 보고 응원해도 그 말이 대단히 효과가 있는 것을 대학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는 이름을 전부 여기에 붙여서 그땐 다녔거든요. 한번은 내 상급생이 이 옆을 지나가다가 딱 서더니만 내 옷을 이렇게 잡고, “히야~이름이 희한한 이름이 다 있네. 용기? 용기가 있겠다.” 그러고 가 버려요. 근데 그 말이 내 마음에 굉장히 깊이 박혔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지금까지 어려운 일만 있으면 “용기를 내라!” 아, 그렇게 말이 자꾸 나오고, 그냥 듣고 넘겼는데 그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어서 ‘참 우리 아버님이 내게 좋은 이름을 주셨구나. 용기가 없을 때 이름만 부르면 용기가 생겨난다.’

여러분 자기 이름을 바꾸어서 불러도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이름을 바꾸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브람, 아브라함.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냥 아브람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자식의 조상’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아내는 사래인데 그를 사라라고 바꿨습니다. ‘많은 자식의 어미’, 그래서 아브라함 ‘많은 자식의 조상’이요, 사라 ‘많은 조상의 어미’. 그래서 자기 이름을 종종 자기가 부르니깐 자기 이름을 통해서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일 처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다닐 때, 하도 나를 훼방하는 사람이 많기에 훼방하는 사람을 피해서 하나님 능력으로 사역하려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용기’라 하는 이름이 가져 좋기는 좋은데, 외국 사람은 모르니깐 ‘다윗’이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조다윗’ 그러니까는 사람들이 조다윗이라고 전 세계에서 부르는데 가는 곳마다 원수가 많이 생겨나요. 그러니 내 생각에 이름이 나빠서 그런가보다. 그래서 이름도 좋고, 하나님 사업도 잘 하는 이름을 바꾸자 해서 ‘다윗’대신에 ‘바울’로 바꿨습니다. ‘조바울’이라고.

그래 놓으니깐 요사이 세계 여러 곳에 가면 저의 이름을 다윗이라고 불렀다가, 바울이라고 불렀다가 그래서 이 혼돈이 돼요. “왜 조목사 이름을 이렇게 하느냐고” 그래서 “그러면 혼돈 안 되게 만들어 주겠다. ‘조 다윗바울, 조 용기’” 이제 나이도 늙었으니 시험해 봐도 괜찮지 않겠어요? 그러니깐 사람들이 자기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주는 것입니다.

말을 하면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불러도 자기가 제일 먼저 듣고, 말을 해도 자기가 들은 말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자기 자신에게 소리 내어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잘한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산다.” 여러분 필요한 말을 꼭 하십시오. ‘네 입에 말로 묶여서 네 입에 말로 사로잡혔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론>

흥망성쇠가 말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 내지 않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장29절)’고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0절로 11절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그것을 따르라’.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로부터 그것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혀로부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 선한 말을 자기에게 말하고 이웃에게 말하면 그 말이 큰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생명을 주는 말을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015. 9. 27. 주일 4부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