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교회마다 빚 때문에 고충을 겪는 사례가 많습니다. 왜 교회가 빚으로 쪼들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 보려 합니다. 빚 때문에 직원들 임금은 계속 동결되고, 복음과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업도 뒷전으로 밀려나며, 돌봐야 할 어려운 성도들에게마저 수수방관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회가 많음을 볼 때, 진정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생겨나는 빚도 있지만, 무리한 건축으로 인한 과도한 빚, 담임목사 퇴직금이나 원로 대우를 위한 무리한 대출 등으로 발생하는 빚이 대부분입니다. 교회 개척 때문에 생기는 빚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교회 건축이나 원로목사 처우 문제로 빚을 진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이를 대신 명령하십니다. 다윗의 마음은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인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부족함 없이 하나님의 성전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철저한 믿음과 순종, 그리고 신실한 준비가 있었던 덕분입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무리하게 성전을 건축했더라면, 위대한 왕으로 역사에 남았을까요? 다윗은 충분한 시간 동안 성전 건축을 위해 재원을 준비함으로써 역사에 길이 빛났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충분한 준비 없이 무리하게 은행에서 대출하여 빚을 해결하느라,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교회 건물은 왜 커야만 할까요? 왜 일부 목사님들은 교회를 등에 업고 자신의 부귀영화와 명성을 얻으려 하시는지요! 교회가 비록 건물은 작을지라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건강하게 감당한다면, 믿지 않은 영혼들까지 교회와 목사님에게 감동 어린 존경심을 표할 것입니다.

소외되고 불행한 이웃을 위해 진행 중인 무료급식이 위기를 맞아 도움을 청해도, 대개 빚이 많아 할 수 없다며 난처해하십니다. 실제로 도울 마음도 없으면서, 빚 때문인 것처럼 자신의 양심을 속입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의자가 없는 마루에서 마이크도 없이 ‘생목’으로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이 많았지만, 그 예배는 은혜가 충만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이 깊어 서로의 물건들을 통용하며 나누는 초대교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웃을 향하여 베풀면서 전도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교회와 중형교회들은 앞다퉈 서로 자신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자랑합니다. 작은 교회를 다니거나 시무하시는 분들은 위축되어, 늘 그림자 신세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초점은 사라지고, 그저 외형과 외모에만 관심이 있어 날로 주님의 영광과는 멀어져 갑니다.

교회는 빚이 있어선 안 됩니다. 믿는 성도들의 빚이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빚 뿐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다하지 못한 사랑을 늘 가슴으로 묻고, 이웃을 향해 표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작으면 어떻습니까? 주님 주신 사랑을 믿음으로 이웃들에게 나누는 교회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교회일 것입니다. 그놈의 빚 때문에 부목사와 전도사, 교회 여러 직원들에게 제대로 된 처우를 하지 못하고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만약 자신의 자녀들이 근무하고 있다 해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교회 직원은 봉사하는 직분이라는 핑계로, 그들에게 제대로 된 처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도리어 교회가 더 앞장서서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야 합니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즐거워야 목표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편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늘 ‘갑’의 편에서 생각하지 말고 말입니다. 담임목사나 원로목사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하면서, 직원들에게는 마치 종 대하듯 합니다.

더구나 요즘 교회학교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이들은 교회에 오려 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인구도 점점 줄어들고 나날이 험악해져 가는 세상에서, 교회가 이 일에 적극 나서야 함에도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어른들 위주로 사업을 진행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외면합니다. 이유를 물으면, 모두 빚 때문이라고 합니다.

총회나 노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꿔야 할 법은 바꾸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하여 미래지향적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혼신을 다해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할 텐데도, 그렇지 못하고 늘 자신의 이익과 안일, 보신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합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서글퍼 보입니다. 진정 그들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사장들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빚을 지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자신이 유숙할 집을 대출받아 짓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돈을 빌리지도, 이웃을 괴롭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하늘 높이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한 교회를 평생 섬기고 사랑하신 분들이 은퇴를 앞두고 금전 문제로 인한 원로목사 추대에 혈안이 되어 평생 쌓아온 아름다웠던 모습을 저버린 채 추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하나님나라를 기대하는 분이 맞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성전 건물이 오래되어 낡았으면, 당연히 보수를 하든 새로 지어야지요! 하지만 무리해서까지 새로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 되는 군중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셨기 때문에 모두 배불리 먹이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서로 내어놓고 나누어 먹었다면 문제 해결은 간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져 온 것으로 자신과 가족만 챙겼다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남은 찌꺼기를 버렸을 테고 일부는 사 먹을 데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쫄쫄 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누어 먹으면 남자만 오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 되는 군중이라도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모으는 것’은 감동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강제와 완력으로는 마음들을 모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감동을 받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마음을 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과 아름다운 일들을 보면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께 외형적인 면보다 내면적인 감동을 배워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외형에 치중하지 말고, 작더라도 주님께서 늘 안겨 주시는 깊은 사랑으로 감동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보물을 이 땅이 아닌 주님 계시는 창고에 쌓아 두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풍요로운 물질 속에 나를 팽개치지 말고, 하나님나라 건설과 이웃을 위해 대출을 받아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외형 때문에 빚을 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작을지라도, 주님만 계시다면 성공한 교회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교회는 빚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여전히 교회에 빚이 많음에도, 목사님께 비싼 자가용을 사 드려야 하고, 강단과 음향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한 투자는 왜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한 빚이 이웃 교회들에게 자랑하기 위함인지, 정말 주님을 사랑함인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