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9월 27일
본문: 고린도전서 9:1~18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목회자 사례에 대한 부담스러운 이야기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9장 1-18절]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변명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꼭 이런 말을 해야 하나?’ 할 정도로 민망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의 변명을 보며 공감하는 부분이 있고, 우리 교인들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세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사도 바울이 그곳에서 행한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웠을 때 바울이 자신들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떠난 후에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배척하기에 이르렀던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참 억울한 일입니다. 자신은 사역하면서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조차도 교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자신의 순수함이 왜곡되고 오히려 나쁜 소문이 도는 것에 대하여 말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의 이런 억울함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억울한 말을 듣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고난은 견디고 힘들면 참으면 되지만, 억울하게 듣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그 ‘억울함’이 목회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두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은 힘들기는 하지만 괜찮습니다. 내가 고치면 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시작하고 매년 한 번씩 소위 말하는 ‘블랙 메일’이 돌기 시작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교회 여자 장로님들에게 그런 편지가 간 적도 있습니다. “김병삼 목사가 집회를 갈 때면 숙소로 늘 자신을 불렀는데, 요즘은 맘이 변해서 자신을 멀리하니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억울한 건, 그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잠시라도 저를 위해 기도한 분들 때문이었죠. 그렇게 조심하고, 메일과 일정표까지도 여러 사람과 공유하며 살아가는데도 이런 이야기가 돌면 의심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말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억울함이라는 것은 사실과 거짓의 문제를 넘어서 나 자신을 자신처럼 믿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감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목회자와 교인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늘 존재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한 번 여러분이 생각하는 목회자 상을 그려보세요.
가난하고 아주 초라하게 사는 목회자를 보고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목회자가 어떤 차를 타느냐를 보고서도, 저 목사님은 여유가 있어서 참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저 목사님은 사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의 생활이 부유하면, 축복받은 목사님이라고 인정하면서 ‘나도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목사님을 보며, ‘자기도 저렇게 살면서 누구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말을 해?’라고 생각하는 교인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든, 욕먹지 않고 살 재주가 없습니다. 모든 교인의 생각을 만족하게 해줄 수 있는 목회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다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회자가 힘든 것은 사역이 힘들다기보다는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든 것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사도 바울의 고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 전해지는 나쁜 소식들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내용이 다 반영되고 있지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즉 자신이 직접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아주 겸손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을 보고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느꼈던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비하했던 것입니다. 사도의 권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일하며 소박했던 그의 사역으로 인해 사도의 존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나에게도 이런 권한이 있다”고 항변하는 내용을 보세요. 2절의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바울에게는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실 권리가 있습니다(4절).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습니다(5절). 재정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7절). 구약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수고한 자가 그 대가를 먹는 것이 마땅하기에,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의 권리는 주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7-9절).
하지만 바울은 스스로 수고하고 종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무능한 모습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가 아니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참 치사한 이야기 아닙니까?
다른 사도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이런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권한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데,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으려고 나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데 자신을 몰라주는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나 야속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목회자에게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교인들을 만날 때입니다.
제가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보았던 어떤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교회갱신칼럼] 목사란 누구인가?-이준행 목사
…목사는 슈퍼맨이 아니라 한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고통 할 수도 있는 인간, 베드로처럼 비겁할 수도 있고, 엘리야처럼 못 먹으면 배고프고, 물 안 먹으면 목마르고, 잠 못 자면 피곤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어떤 교인은 “목사도 감기 들고 병이 날 수 있느냐?”고 하지만, 목사도 감기들 수 있고, 몸살 날 수 있고, 암에 걸릴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아침, 포항에서 해병대 초소가 무너져 해병대원 3명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아내가 볼까 봐서 TV를 끄고 목양실로 내려와 인터넷으로 들어가 확인했더니 주 상병과 대학교를 휴학하고 올해 4월에 입대한 이모 이병 등 3명이 죽었다는 기사가 보였습니다. 순간 4월에 입대하여 포항에서 해병으로 복무하는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해병대 민원실을 통해 본부로 연락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부모들이 와 있었고, 제 아들과 함께 훈련받고 같은 소대에 근무하는 친구들로서 저녁 시간에 경계근무를 담당한 군인들이었습니다. 새벽에 그 장소로 근무하러 들어갈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이 울부짖고 있을 텐데…. 
제 아들 아니라고 저는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감사해서 울고, 부끄러워서 울었습니다. 나중에야 분위기를 파악한 아내가 눈물을 닦아주면서 위로해 주었지만, 뛰는 심장을 진정하기도 어려웠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목사의 연약함 때문에 부끄러워서 울었습니다. 목사도 이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와 지체들의 격려 없이는 감당하기 힘든 자리가 목사의 자리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권리들을 사용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목회자인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졸업식장을 혼자 걸어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던 나의 모습이 혹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없는가? 당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목회 때문에 아들의 졸업식에 올 수가 없었고, 저는 친구들이 졸업식을 마치고 사진을 찍을 때 혼자 교문을 나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졸업식 사진이 없습니다.
내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아버지인가? 어떤 남편인가? 좋은 아버지와 남편이 되어 좋은 목회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인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자꾸 도전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중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던 한 사람이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하다가 펌프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펌프 속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었습니다. 실망하려 돌아서려다 펌프에 적혀 있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펌프에서 동쪽으로 2m쯤 되는 곳의 모래를 파헤치면 큰 돌이 나올 것입니다. 그 돌을 들면 플라스틱 통이 있습니다. 통 안에는 물이 가득 들어 있으나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물을 4분의 1쯤 펌프에 부어서 메마른 가죽을 축이십시오. 약 15분쯤 지나면 가죽이 다 불어나게 되는데, 이때 통의 물을 서서히 부으면서 계속 펌프질을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넘치는 물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있던 물통에 물을 넣어서 마개를 꼭 막아 다시 제자리에 놓은 후 돌을 덮고 그 뒤에 모래를 덮어 두십시오.”
하지만 누구든지 그 돌 밑에 깔린 물통을 발견했을 때 유혹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물을 다 넣고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에 있는 물은 한없이 많이 흘러가는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그 물이 없으면 지하수도 펌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 펌프가 계속해서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목을 시원하게 해 주는 생명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유익과 욕망을 절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통속의 물을 마셔버렸다면 뒷사람들은 모두 목이 말라 고통 속에서 사막을 건넜거나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마중물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실, 사도권을 인정받으려는 욕구 역시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보다 복음을 들을 사람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고 모욕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참다운 사도의 마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사도권’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정한 권리
적어도 사도의 권위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져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11제자와 사도 바울만이 사도로 불림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을 ‘제자’ 혹은 ‘사역자’로 불렀을지 모르지만, ‘사도’라 칭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는 주님께서 보내신 자의 영적 권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사도들을 대할 때 ‘주님이 여기 계시다면’이라는 심정으로 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어디를 가든지 먹고 마시는 일을 걱정하지 않고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대단한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결혼한 자로서 그의 아내와 같이 다녔을 때, 대우를 받았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권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영어의 ‘authority’, ‘right’, 혹은 ‘power’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고린도는 복음을 전하기에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전도하며 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도들처럼 말씀 사역에만 자신의 시간을 할애할 권리도 능히 있습니다. 굳이 천막을 치며 자비량 선교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말씀 사역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권리는 초대교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도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본문 7절에서 말하는 것을 보세요.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모든 사람은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군인들에게 마땅히 필요한 물품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은 농부가 그 열매를 먹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양치는 목자가 그 양의 젖을 먹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고, 고린도 교회를 밭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자기 사역의 대가로 생활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교린도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떠날 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쓸 것을 두 차례나 보내주었습니다(빌4:15-16). 고린도후서 11장 8절에서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다른 사역자들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역에 대한 보상을 받았음을 분명하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12절) 스스로 노동을 해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른 신자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신앙적 본을 보여 주길 원했습니다(살후3:6-9).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권세를 사용하기보다는 진정한 목회자로서 권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권리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권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본문 15~16절의 말씀입니다.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정말 심오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사도의 권한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이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쓴 것은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사도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의 자존심을 가진 것이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봐도 자신의 사역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랑을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득불’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추측이 있겠지만, 어떤 이는 이야기하기를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의 몸의 질병이 도져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니 그가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매를 맞을까 봐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이 자랑스럽지만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제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원우회 총무를 하고, 원우회 회장을 맡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원우회 회장이 된다는 것은 작은 명예와 더불어 full scholarship을 받을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통례적으로 원우회 총무를 거쳐 회장을 맡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저의 권리였습니다.
그런데 한 해 선배 되는 분이 저를 찾아와서 부탁했습니다. 자신이 원우회 회장이 되고 싶다는 것, 그 이유는 장학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지지하던 후배들과 친구들이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굳이 선거전을 하자는 선배의 말에 저는 제가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내주었습니다.
저는 그때 참 추악한 저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을 저의 명예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의 명예, ‘나는 돈을 포기하는 깨끗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고자, 그 사람을 경멸하는 명예심’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대놓고 돈과 명예를 탐하던 사람보다 더 비열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제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상대방을 비겁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을, 내 것을 포기하고 상대방에게 주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실 많이 섭섭해 하고 상처를 받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 것이 아니요, 내 삶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포기하는 것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받은 것이 많고, 그 사람처럼 등록금이 절박한 상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포기한 것을 가지고 자랑할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지만 자랑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역, 그리고 결단.
사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의 선택은 또 다른 나의 욕망, 감추어진 욕구, 감추어진 비열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의한 결단이라면, 선택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기도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로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변명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자신 없음이 ‘헌신’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명예와 또 다른 욕망이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찬양이 있지요?
1.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 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디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2.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거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들”
가장 부담스러운 말이 ‘돈’ 이야기 아닐까요? 결국, 많은 갈등의 문제도 속을 들여다보면 돈의 문제이기도 하구요.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실종된 신뢰 문제 역시 돈의 문제는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종종 들리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은퇴하는 목사님들의 예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대두가 됩니다. 결국은 돈에 대한 문제죠.
평생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는데 은퇴할 때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는 교회 때문에 소송을 제기한 목사님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모든 것을 바쳤는데 억울하다.’
이러한 항변에 대하여 어떤 교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의 사역은 헌신이고 드린 돈은 헌금이지, 보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목회자들 사이에서 은퇴할 때 교회나 교인에 대한 기대를 하지 말고 알아서 준비하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지요. 또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은퇴하면 부담이 되니, 은퇴하기 전에 목회자를 바꿔보자는 말도 한답니다. 돈 때문에 목회하는 것이 아니지만, 돈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에서의 문제입니다.
일부분이지만, 이런 갈등으로 인해 서로가 더욱 탐욕스러워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교회에서의 처우 즉 사례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그 갈등을 보며 신앙적 해답을 내놓은 사도 바울이 더욱 귀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냥 꿈같은 일을 기대해 봅니다. 물질에 대한 기대보다는 복음 전하는 사명이 기뻐서 헌신하는 사람들. 그리고 헌신하는 사역자들이 안쓰러워 어떻게 해서든지 삶을 책임지려는 사람들.

조금 더 가지려는 싸움보다는 조금 더 헌신하고 조금 더 포기하고 조금 더 주려는 치열한 싸움! 그것이 꿈이 아니기를 생각해 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9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보면 더 이상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한번 볼까요?
“3-7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거리낌 없이 항변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선교사로 임명받은 우리에게는, 그에 걸맞은 편의를 도모할 권리가 있습니다. … 바나바와 나만은 혼자 힘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군인이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군복무를 합니까? …
12-14 우리는 정당하게 요구할 권리를 줄곧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권리를 행사할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방해가 되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보다는, 차라리 무슨 일이든지 참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만 나는 여러분이 우리의 결심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정당한 몫을 가로채지나 않을까 염려할 따름입니다. …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은 그 메시지를 믿는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15-18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이 권리를 행사한 적이 없으며, 이렇게 편지하는 것도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 내가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은, 그것으로 나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나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메시지를 전하여 생계를 꾸리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면, 나는 약간의 급여라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내게 엄숙하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사례비를 받고 안 받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복음을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유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성숙’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살라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 부쩍 드는 생각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올바른 일들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복음에 장애가 되는 것도 있고, 복음에 유익이 되는 일도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가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사도 바울의 마음은 16절에 있는 ‘부득불’이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보았던 자신의 상급은 ‘삯’이 아니라 ‘값없이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죠. 혹시라도 우리의 권리인 ‘돈’을 강조하다 구원받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 시대에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며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도 돈을 더 탐내어 성령님을 속인다고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착각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이 ‘성직 매매’란 뜻을 가진 ‘simony’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서 18년 동안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헌금에 관해 설교할 때 꼭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인색한 마음이 없이 후하게 헌금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여러분에게 헌금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생입니다”라고 설교하면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돈 때문에 실족하거나 복음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려면 신자는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다녀도 신자가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헌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면 참 역설적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자유를 얻게 된 순간 그는 섬기는 종이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음 상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일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명’에 헌신하며 얻게 될 대가가 아니라 그 헌신이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