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8월 23일
본문: 고린도전서 6:12~20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우리는 새로운 기준으로 삽니다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6장 12-20절]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오늘은 [스마트한 생각들]에 나오는 이야기를 말씀을 열어보겠습니다.
때로 ‘집단 충동’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검증’은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나도 행동하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생각에 대해 옳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생각은 더 정확하다는 것인데, 이런 믿음은 물론 부조리하다. …
가령 당신이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에 세렝게티 평원에서 사냥을 하는데, 갑자기 당신의 동료들이 허겁지겁 도망을 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이마를 긁으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사자인지, 아니면 사자처럼 보이지만 그냥 무해한 동물인지 생각해보고 있겠는가? 아니다.
당신은 될 수 있는 한 재빨리 동료들의 뒤를 쫓아 달려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는 일은 나중에 안전을 확보한 후에도 할 수 있다. …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토크쇼에서는 특정한 부분에 가짜 웃음을 삽입해 시청자로 하여금 따라 웃게 만듦으로써 사회적 검증을 이용한다. …
어떤 회사가 자기네 상품이 ‘가장 잘 팔리는 것’이라고 광고하며 구매를 부추긴다면 의심해보라. 단지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라고 해서 가장 좋은 상품이라는 근거는 없다.
작가 서머싯 몸의 말처럼 “비록 5천만 명의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끊임없이 사도 바울이 고민하며 경계했던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을 믿고 은혜를 사모하며 살던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려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거스르며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만 있을 때는 모르겠는데, 세상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우리는 괜히 바보 같은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붙들어야 하는 진리가 없다면 참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야 하는 가치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가치와 기준으로
오늘의 주제는 지난주 나누었던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가치와 기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 말씀의 연속선상에서 보아야 하겠고, 크리스천의 삶이 이 세상에서 가치의 기준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의미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한참 테니스를 좋아할 때가 생각납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찾아간 동네 테니스코트에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승부보다는 운동이 목적이었고, 목사로 나 자신을 소개한 터라 매너를 지키는 게 참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중요한 시합을 할 때면 저에게 심판을 봐 달라고 하더군요.
일단 경기가 시작되고 승리욕이 발동하기 시작하면 볼이 라인 안으로 들어갔는지 밖으로 나갔는지 참 예민하게 생각하고 반응합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다가도 제가 ‘인’ 혹은 ‘아웃’이라고 하면 잘 따라주더군요.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목사님이 ‘인’ 이래!”
아마도 기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가진 ‘가치’ 때문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목사로서 살아가면서 꼭 붙들려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만일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혹은 없다”는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살아가라고 한다면, 세상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세상은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법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서 영적으로 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내가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을 무엇이나 하면서 돌아다녔다면, 나는 변덕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
주님께서 몸으로 여러분을 영화롭게 하시니, 여러분도 자신의 몸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어쩌면 오늘 말씀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분깃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혹시 우리가 ‘옳음’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덮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혹시 우리는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이것이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이야기입니다.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이 하루는 잠시 머리도 식힐 겸해서 시골로 여행을 떠났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날 때였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채플린은 그 현수막을 보고서 흥미를 느끼고서는 그 대회에 참관했다.
모두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채플린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그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그대로 그곳에서도 했다.
그런데 심사결과는 재미있게 나왔다. 놀랍게도 채플린은 1등을 못했다. 그는 그 대회에서 겨우 3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대회에서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 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셈이다.
세상에는 가짜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 있는 어떤 참기름 가게에 가면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만 판매합니다."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이라고 했겠습니까? 목사도 다 같은 목사가 아닌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목사님은 아들을 목사로 서원하며 그 이름을 <목사>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참 힘들어하는 것이 정체를 숨기고 다가오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율법적 잣대를 가지고 크리스천의 가치를 판단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올바른 크리스천임을 증명하기 위해 옳고 그름으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나의 옳음이 돋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옳음이라는 것도 참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법도 공의롭지 않습니다. 결국은 누구의 편에 서느냐가 법의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참 고민스러운 숙제를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무엇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바꾸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유익한 일을 할 때이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 하는 일은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크리스천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년 초에 있었던 IS의 참수로 사람들의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특히 일본인 고토 겐지의 죽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삶을 평화를 위해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살았던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옳은 것을 찾아 행동한 사람이 아니라 유익한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일본 국민의 반응이 싸늘합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지 말아야 할 곳에 찾아갔으므로 그의 죽음이 오히려 일본에 피해를 줬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라는 잣대 앞에서 한 고귀한 생명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고토 겐지로 인해 수년 전 순교한 배형규 목사의 이야기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가 포로로 되었을 때, 한국의 네티즌들이 탈레반에게 배형규 목사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영어로 보내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가 총으로 난사를 당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 네티즌들이 다 잡히고 난 후에 배형규 목사의 가족들이 그들을 용서함으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 말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많이 생각해야 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햇볕 같은 이야기]에 참 따뜻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영국에 어느 대학에서 1등, 2등 다투는 학생 둘이 있었다. 1등 하는 사람은 동양 사람이고 2등 하는 사람은 영국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조금의 점수 차이로 동양 사람이 1등만 했다. 영국 사람들은 “야, 너 어떻게 해서든지 1등 좀 해봐라”고 늘 얘기했다.
한 번은 늘 1등만 하던 친구가 며칠 동안 계속 학교에 안 나왔다. 그래서 2등 하던 영국 친구가 알아봤더니 교통사고로 그 친구가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은 “야 잘됐다. 이번에는 네가 1등 하게 생겼구나!”라고 좋아했다.
나중에 학기가 끝나니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학교에 못 나왔던 그 학생이 또 1 등을 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그가 일어나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내 경쟁자가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위문해 주었고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전부 필기해서 날마다 찾아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랬었기 때문에 내가 병원에 누워 있었어도 나는 공부를 다 할 수가 있었고 또 1등이 되었습니다. 난 공부벌레가 되어서 성적은 좋았지만, 인격적으로는 저 사람이 나보다 몇 배 나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할 때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2등 하던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삶의 가치와 기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에게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림을 받은 성도들 자신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잘못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지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몸을 함부로 굴려도 된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이 부분은 오늘 본문 전반부의 성도들의 자존심과도 연결되는 것이지요. 13절을 보세요.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우리의 값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함부로 우리의 자신을 굴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존귀함을 지키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품위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전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중전으로 간택되는 순간 궁에 들어가 법도를 배웁니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그 권력에 맞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 불림을 받는 순간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유자로서 가져야 하는 품위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몸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아주 잘못된 사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원론’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육체와 영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은 극단적인 사상으로 이끌어 가는데, 악한 육체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즉 금욕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행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수도원에 갇혀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가능하면 육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절제합니다. 먹는 것도, 성욕도, 입는 것도 버리고 학대합니다.
또 하나의 경향은 쾌락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구원을 받았으므로 육체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욕망으로 흐르는 육체와 거룩한 영을 구분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이 두 가지의 형태에서 아주 잘못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끊고 육신을 학대하는 경향, 그래서 율법으로 자신을 자꾸 채찍질합니다. 육신이 편해지거나 너무 잘 먹고 행복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하나의 경향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 육신의 생활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이 용서가 되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삶을 철저하게 신앙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이 이중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일원론적인 사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선하매 버릴 것이 없습니다. 육신의 일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몸을 바라보는 신앙적인 관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3절을 보세요.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몸이 악하거나 선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느냐?”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몸이 음란을 위하여 존재할 때 ‘음행’을 합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니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몸이 주를 위하여 존재할 때,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라고 말씀합니다.

결국은 몸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의 문제인데요, 몸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육에 속한 존재로 살아가느냐, 영에 속한 존재로 살아가느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정의 단서가 바로 ‘신분의 변화’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자녀 중에 딸이 있다고 합시다. 얼마나 예쁩니까? 그런데 이 딸이 시집을 가기 전에는 분명히 우리 집안의 딸이었는데 시집을 가면 남의 식구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딸을 흔히 강도라고 말합니다.
결혼하면 2인조 강도가 되고, 아이를 낳으면 떼강도가 됩니다.
시집간 딸은 친정에 오면 무엇을 가져갈까를 생각하지요. 아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결혼하면 더 이상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단지 며느리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그렇습니다.
신분이 변하면 어디에 삶의 무게를 두어야 할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바뀐 신분으로 우리가 어떤 삶아야 하나요?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고백은 바로 그런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다루기가 민망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18절 말씀을 보세요.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섹스에는 살갗과 살갗의 접촉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섹스는 육체적 사실만큼이나 영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두 사람이 한몸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 성적인 죄는 다른 모든 죄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적인 죄는 우리 몸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사신 여러분의 몸을 함부로 굴리면서 제멋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 안에서, 여러분의 몸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십시오.
요한 일서 3장 9절의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이 드러나도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가진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게 산다면 참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의로운 척하지만 실상 자신의 몸과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다면 말입니다.
유기성 목사가 쓴 [우리, 서로 사랑하자]라는 책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대학교에서 중간고사를 앞두고 학생들이 밤새 시험 준비를 하고 왔는데, 교수님이 시험을 며칠 뒤로 미루겠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이 일어나서 대표로 교수님께 항의했습니다.
“교수님,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오늘 시험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제 얼마나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는데, 이러면 다른 시험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은 그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네 이름이 뭔가?” 하면서 출석부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갑자기 목소리가 확 작아지면서 “김철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출석부를 펼쳐 보면서 말했습니다. “김철수? 자네는 용감하군.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네, 자네는 시험 안 봐도 A 학점이야.” 그러자 그 학생이 너무 당황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아까는 당황해서 제 이름을 잘못 말했습니다. 제 이름은 이영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기준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우리의 자유를 쓰지 않는 이유,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이고, 그분이 우리를 값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였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의 노예로 있을 때는 죄의 성향에 따라,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유가 바뀌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의 말씀을 보세요.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참 신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온전히 살면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때입니다. 좀 어려운가요? 지난해 우리 교회를 방문했던 마이클 오 목사가 쓴 [I am Nothing]이라는 책에 나오는 그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나는 특별한 게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사실 이것은 아시아의 한 영향력 있는 지도자에게 확인받은 사실이다. 4, 5년 전의 한 모임에서 내 이름이 불렸을 때 그의 반응은 이랬다. “마이클 오가 누구죠? 게다가 그는 완전한 한국인도 아니네요. 그는 일본에서 작은 신학교 하나를 이끌고 있을 뿐이에요. 일본의 중요한 지도자들도 그를 몰라요. 그런 그가 어떻게 로잔위원회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돼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기뻤다. ‘마이클 오가 누구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야!’ 주님을 찬양하라! 그날 밤 한 행사에서 연설을 하기 전에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주여! 저를 마가복음 12장의 과부처럼 만들어주소서. 이름도 없고 가난하지만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쏟아 붓게 하소서. 그 과부처럼 되기를 열망합니다. 크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기성 지도자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해도 좋으니 우리 주님께는 주목과 긍휼을 받는 종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밤 저를 도우시어 동전 두 닢어치의 제 가치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쏟아 붓게 하소서.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다들 내가 원하기만 했다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아이비리그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네 개의 학위를 받았다. 지금 나는 석사학위 세 개와 박사학위 한 개를 가지고 있다. 우리 누나와 매형, 형님과 아내와 나, 이렇게 다섯 명의 학위는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코넬,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받은 것을 포함해 모두 열다섯 개다. 그리고 우리 다섯 명 모두가 현재 선교사로서 선교 현장에 있거나 혹은 선교 현장을 향해 가는 중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시아의 부모들이 그렇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물론 우리 역시도 이것이 비극적인 일이 아니라 엄청나게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이 말을 듣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삶이 다 선교사로 헌신해야 가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가지고,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기준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 설교에 이런 예화가 나오더군요.
“저는 장사에 대한 문외한입니다만 가끔 개업 예배에 가서는 교역자로서 한 마디 부탁을 합니다. 앞으로 이 집에서 물건을 팔 때는 정당한 값을 받고, 절대로 깎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령 만 원짜리 물건을 팔천 원으로 깎아 주면 손님들이 당장은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돌아서고 나면 더 깎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과 함께 물건의 질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물건에 대해 기쁨이 없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지급한 대가만큼 가치가 주어집니다. 많은 대가를 주고 산 물건은 귀하고 그만큼 소중히 여깁니다. 많은 희생을 지급하고 얻은 것이 훨씬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도박판에서 쉽게 번 돈은 방탕하게 쓰고, 땀 흘려 번 돈은 함부로 쓰지 못합니다. 즉 값이 얼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지급한 대가만큼의 값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의 말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본문 19절의 말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어서 행하지 못하는 무기력함 때문이라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여기에 어떤 품위와 권위가 존재하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참고 인내하고 살아가는 데 아름다움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품위 있는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합법적이냐?”를 묻지 마십시오. 그 대신 “그것이 누군가에게 유익한 것이냐?”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지만, 식욕에 지배당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도들이 성생활을 할 수 있지만, 육욕에 지배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가치는 언제 드러날까요?
십자가의 은혜로 대속 받은 우리가 써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를 대속하신 분의 소유권입니다. 그렇게 싸게 취급할 수 있는 것, 소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신 분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또 하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위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좋은 스펙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생각. 
나는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세상적 기준과 가치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교회가 커야 하며, 모든 크리스천이 고위 공직에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핏값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이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20절을 보세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이제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자유로이 이러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차라리 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를 위해 나의 의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짝 빈들에 나가야 할 일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육체의 고통 가운데 거할 때, 그것이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내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평화와 행복을 누릴 때, 죄책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