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최근 어느 중학생이 1학기 성적표 때문에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잡히는 사건이 있었다. 이미 학기 초에도 성적표를 위조했다 부모에게 걸린 적이 있다. 게다가 1학기 성적표가 나올 때가 되자 불안하고 두려웠다. 성적표가 형편없기 때문에 부모에게 혼날 것 같았다. 그래서 가출을 했다.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결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잡히고 말았다.

살다 보면 죽을 것 같은 시기가 있다. 숨을 못 쉴 정도로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그래도 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때도 ‘죽음의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웃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인생을 끝낼 수 있는가?

더구나 하나님이 나를 자신의 형상대로, 존귀한 존재로 지으시지 않았는가? 나를 대속해 주기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어떻게 죽을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서로를 매우 사랑하는 부부가 보금자리를 꾸몄다. 30년을 함께 살면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곱게 잘 길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단 한 번도 서로를 미워할 만한 부부 싸움을 한 일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전도도 받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무척 행복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예수가 끼어들면 재수가 없다’고 거절할 정도였다. 그들은 늘 입버릇처럼 ‘우린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결혼한 지 31년째 되던 어느 늦가을 오후,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을 남겨둔 채 남편이 먼저 간 것이다. 그토록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그녀의 반석이 무너진 셈이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아내는 충격과 슬픔으로 자리에 몸져 눕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준비해 두었던 수면제를 먹고 ‘남편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써 둔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녀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전도를 받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했다. 31년 동안 믿고 의지했던, 그녀의 반석이던 남편은 그를 떠나갔다. 하지만 그 대신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님이 그녀 곁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님께서 그녀의 마음 속에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주셨다.

살다 보면 ‘죽을 것 같은 절망적인 날’도 다가온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는 것처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있다. 바울도 아시아에서 선교 사역을 할 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통’을 경험했다(고후 1:8-9).

그러나 그는 고백한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포기할 순 없다. 하나님이 죽지 않았으니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거니까.

‘생명의 삶’에서 오산시에 사는 구은희 씨의 간증을 본 적이 있다. 어느 해 봄, 그가 섬기는 교회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하나님께 약속했다. “하나님, 교회 근처로 이사 가면 새벽예배에 잘 나가겠습니다.” 여섯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새벽예배는 여러 가지 핑계로 나가질 못했다. 그저 마음 뿐이었다.

그런데 새벽제단을 쌓기 시작한 후,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회개 기도가 나왔다. 처음으로 기도 중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후 새벽예배를 드리는 중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제껏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음성도, 살아 계심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주세요.”

그도 모르게 나온 간절한 기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직장 동료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만져 보았다. 그런데 왼쪽 가슴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다음 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유방암 판정이 나왔다. 순간 자신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성경책을 폈다. 순간 한 구절이 눈에 들어 왔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리고 그렇게 듣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은희야,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라.”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마음에 형용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찾아왔다. 이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 암세포를 수술로 제거했다. 4번의 항암치료와 34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6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잘 이겨냈다.

암이라는 질병도 인생의 ‘끝’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밑바닥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허덕일지라도, 절대로 ‘절망의 끝’이라고 단정짓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다. 분명히 절망적인 때는 맞다. 그러나 절망의 ‘끝’은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여지가 남아 있다.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문도 열려 있다.

희망의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 그러면 절망적인 인생의 밑바닥은 희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먼 훗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살아야 할 이유만 찾으면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환경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이 닿는 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건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강한 신뢰와 확신’이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도 주님이 손길이 접속되면 변화가 일어난다.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밑바닥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기조절 장치이다. 형통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되는가? 지금 잘나가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바로 그 때를 조심해야 한다. 이런 때 교만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자만의 질병에 걸릴 수 있다. 그러면 진짜 끝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고난’이라는 안전장치를 주셨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잘나갈 때 ‘내가 해냈다’고 건방지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뭐든지 다 잘할 수 있다’고 거만을 떨지 말아야 한다. 무너지지 않는 인생은 없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쓰러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원히 잘나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고, 곤두박질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만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실 것이다. 그곳에서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