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창조와 구속은 분리된 개념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구속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창조 교리는 성경에서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중요한 공동선언인 니케아신경과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창조 교리는 발전하지 않고, 구속 교리만 발전해 온 감이 있다. 20세기 들어 이 같은 경향은 구약신학과 교의신학 양편에서 심화된 감이 있다. 그 중심에는 구약신학자 폰 라드(Gerhard von Rad, 1901-1971)와 교의학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있다. 이들이 볼 때 자연은 늘 구속 은총 앞에 무력하거나 구속에 종속될 뿐이다.

하지만 사실 창조를 무시하고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의 시작이 창조요, 인간의 시작도 창조요, 천국도 새 하늘과 새 땅, 곧 재창조의 장소이다. 창조를 떠나서는 구속을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구약학자 슈미트(Hans Heinrich Schmid)가 말하듯, 모든 신학은 특별히 창조를 말하지 않아도 창조신학인 것이다. 이렇게 자연계시의 중요성을 모든 신학자들이 외면하거나 방치해 온 것은 아니었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와 토마스 토렌스(Thomas Torrance),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등은, 자연계시에 주목한 최근의 주요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시대를 뛰어 넘어 어거스틴과 칼 바르트는 자연계시에 대한 이 같은 두 흐름에 있어 서로 맞은편에 선, 대표적인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계시와 자연신학을 철저히 거부하는 칼 바르트의 입장이나, 어거스틴처럼 자연 계시의 의미를 이해하여 창조신학의 우선성을 잊으면 안 된다는 슈미트의 입장은 충돌하는 듯 보이나, 사실 창조신학과 구속신학은 무조건적인 대립이 아닌 늘 씨줄과 날줄처럼 보완과 결합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경과 자연

자연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개념이다. 즉 자연에 유일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우주와 지구조차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는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Gaia) 가설이나 서울대 물리학 교수를 역임한 장회익 박사의 온 생명 이론(Global Life Theory)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타난 다양한 “자연” 개념 안에서 자연에 대한 유일한 권위적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연은 해석된 개념이다. 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초대 기독교의 믿음은 확고하다. 창조주는 우주와 역사의 통치자요 주관자이다. 그리고 그 창조주는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창 1-12장). 이것은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나, 신플라톤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가 말하는 ‘(선을 뛰어 넘는) 초 본질적 존재’와도 다르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주권자이시다.

이 피조된 세상(자연) 안에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흔적(계시)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계시이다(시편 19장, 로마서 1장 20절 참조). 보통은 자연계시를 확장하여 창조를 통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실존과 성품, 그리고 도덕률에 대한 지식을 통틀어 일반계시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계시라는 명칭을 일반계시와 구분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교회와 전통은 성경이 계시하는 이 증언을 기초로 하나님이 세상을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했음을 인정하여 왔다. 이 우주의 시간과 공간과 빛과 어두움을 포함한 모든 물질과 생명은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 심지어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들조차 창조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했다(골 1:16). 또한 그 창조주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처럼 이 세상에 무관심한 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격적인 신이다(요 3:16).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인정하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은 부정하는 일종의 초월신론(超越神論)인 이신론(理神論, Deism)도 성경적 창조론은 아니다.

창조와 구속,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유대교 출신인 사도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속과 부활의 주가 되며 창조주임을 확신하면서,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자신들의 시야를 확장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복음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성경이 창세기 1장 1절에서 창조에 대한 선포로 시작하는 창조 계시이기는 하나, 성경은 또 다른 의미의 특별계시이다. 창조 계시가 없었다면 과연 누가 창조에 대해 인식하고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신학을 창조 계시만으로 할 수는 없다.

자연계시와 자연신학

그런데 이 자연계시를 가지고 신학을 전개하는 것을 자연신학이라고 한다. 즉 자연신학은 특별계시에 호소하지 않고, 일반계시 안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증명하거나 믿음을 정당화하려는 논증이다. 이 논쟁은 지금까지 지속되는 신학사의 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때(19세기) 자연신학은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여 왔다. 그리고 이 논쟁에는 신학자들 뿐 아니라 흄(D. Hume)과 칸트(I. Kant)를 비롯한 세속적 철학자들과 사회학자, 자연과학자들까지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해석은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사람들은 보통 자연신학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럴 경우 자연신학 사상의 출발점은, 자신을 보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된다. 기독교적 헌신을 지닌 운동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창조론 운동의 한 분파인 지적설계운동의 중심에 있는 윌리엄 뎀스키도 지적설계운동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신학을 보다 세련된 형태로 시도하려는 운동임을 표방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지적설계운동과 자연신학이 전혀 충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자연신학은 기독교 신념과 믿음에 대한 헌신이 없어도 이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한다. 자연이 은총의 영역보다 약간 낮은 영역이기는 하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두 영역 중 하나이다. 지적설계 삼총사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클 베히가 가톨릭 신자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지적설계운동에는 로마가톨릭, 이슬람, 만유내재신론자, 유대교, 힌두교, 범신론자, 이신론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창조론자들도 기꺼이 참여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신학에서 불신앙에 대항할 수 있는 유용한 논증을 발견하려 하는 반면, 이신론자들을 비롯한 비기독권 창조론자들은 오히려 자연신학에서 특별계시를 부인하고 정통주의 신학에 대항할 수 있는 논증을 발견하려 한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성경적 신앙

성경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신 복음의 계시를 전제하고 거기에 기초를 둔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 초점을 맞춘 자연신학과는 그 방법론이 다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학은 복음적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가 지적설계와 자연신학 모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신학과 지적설계가 분명 신학적·철학적 함축이 있는 운동임은 사실이다. 특별히 지난 세기까지 자연주의의 도전에 조금은 방치되어 있던 신학에 큰 각성을 촉구한 면이 있다.

성경이 자연의 계시를 분명 말하기는 하나, 성경과 성경에 따른 믿음을 토대로 창조주의 창조 질서와 섭리와 흔적을 찾으려는 것과, 성경 없이 자연계시만으로 복음을 완벽하게 증거하려는 것은 조금 다르다. 즉 정통 복음주의는 성경을 전제하므로, 성경 없이 창조주와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는 궤도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연신학이 자연신학의 전부일까? 성경적·복음적 자연신학은 없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자연신학을 복음을 전제한 창조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면, 그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어거스틴과 칼빈으로 이어지는 신학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창조신학이라는 이름이 아닌, 아예 <자연신학이라는 이름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자연신학의 새로운 추구>에 나서고 있다. 과학 기술이 숨가쁘게 세상을 바꾸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바른 신학을 바탕으로 한 창조론 운동이 필요할 때이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두 주요한 인물인 어거스틴과 칼 바르트의 입장에 대한 재검토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