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인생길은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고달프고, 때로는 막막하다. 때로는 부부마저도, 부모와 자식, 형제마저도 서로 속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때가 있다. 그때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가 바로 친구이다.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절친한 친구야말로 소중한 인생 자산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좋은 친구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고도 한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말한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친구란? 마음을 터놓고 대화 나누고 상담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필요한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존재이다. 피곤하고 지칠 때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존재이다. 서로의 생각과 사상에 물들어가고 닮아가는 존재이다.

다윗에게는 자기 목숨을 걸고 친구의 목숨을 보호해 준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 다니엘에게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절친이 있어서, 함께 의논하고 영적인 동역자가 되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 자산인가?

한편 인간 친구의 한계도 잊어선 안 된다. 욥에게도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 욥이 어려움을 당하자 외국에서 멀다 하지 않고 단숨에 찾아온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욥을 보면서 소리 높여 울었다. 자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7일 밤낮을 욥과 함께 땅에 앉아 있었다. 욥의 고통이 너무 심한 것을 알고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욥 2:11-13).

그러나 나중에 욥이 이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욥 13:4).”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욥 16:2).” 욥의 친구들은 옳은 말을 했다. 신학적이고, 신앙적이고, 영적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욥의 상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욥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는 못했다. 욥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큰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 주는 친구들이었다. 인간 친구는 여기까지다. 아무리 가깝고 좋은 친구라도 한계를 갖고 있다.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생과 사를 서로 약속한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둘은 산길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곰이 나타났다. 서로 손을 잡고 다정스럽게 걷던 두 사람은 ‘걸음아 나 살려라!’고 정신없이 도망갔다. 자기 먼저 살겠다고 혼비백산하여 뛰던 한 친구는 나무에 올라가고, 다른 친구는 뛰다 돌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진 친구는 순간 옛말이 생각났다. “곰은 숨이 끊긴 사람의 시체는 해치지 않는다.”

드디어 곰이 다가와서 코와 입을 씩씩거리면서, 넘어져 있는 친구의 얼굴에 입과 귀에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친구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자 곰이 그냥 돌아갔다. 곰이 사라진 후 나무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친구가 내려왔다. 그리고 넘어졌다 간신히 살아난 친구에게 물었다. “곰이 네 귀에 대고 뭐라고 하더냐?” 친구가 말했다. “급할 때 저 혼자만 살겠다고 나무에 올라가는 그런 친구하고는 앞으로 사귀지 말라고 하더라.”

사람에게서 모든 위로와 도움을 기대해선 안 된다. 사람은 당신이 기대하는 만큼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아무리 좋았던 사람도 한순간 바뀔 수 있다. 다 믿지 말라. 다 의지하지 말라. 다 기대하지 말라. 실망만 남을 수 있으니까. 상처만 안을 수 있으니까.

인생에 아주 소중한, 또 다른 친구가 필요하다. 사람처럼 변하지 않는 친구,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보면 너무 놀랄 만한 일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친구’로 두셨다.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벗이라고 말한다(약 2:23).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가르쳐 주신다(창 18:17).

예수님도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종’(둘로스)은 노예로서,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해도 된다. 단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친구’는 마음속을 다 알고,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친구인 제자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 부르셨다(요 11:11).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다. 신과 인간으로 접근하지 않으셨다. 아주 친밀한 관계, 아주 각별한 관계를 가리키는 ‘친구’로 간주하신다.

내 가슴을 뛰게 만든 말씀이 있다. 종교적 엘리트들이 말했듯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사셨다(눅 7:34). 만왕의 왕,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내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내 친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로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친구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하셨다(요 15:13). 이런 예수님을 친구로 둔 사랑은 행복하다. 복 있는 인생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인생 자산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구인 나는 어떤가? 적어도 이런 친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첫째,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내가 진짜 예수님의 친구라면 ‘친구인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가 원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친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종’을 원하는 게 아니다. ‘친구’를 원하고 계신다. 친구라면 함께 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주님과의 교제를 충분히 즐겨야 한다.

셋째, 친구를 깎아내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라는 책을 쓴 조안나 위버 여사가 말한다. “내 구주님을 최고의 관심사로 여기며 사랑할 수 있도록 내 모든 소원과 소망들을 다 내려놓고 싶다.” 그런데 그녀가 하는 탄식의 소리도 기억해 두자. “갈수록 하나님을 깎아 내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늘어난다.” 내 친구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친구의 길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마 26:50).”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친구’라고 부른다. 여기 나오는 ‘헤타이로스’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동료를 말한다.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런 친구다.

그렇다. 나를 ‘내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나를 친구로 간주하셔서 목숨까지 십자가에 내놓으신 참 좋으신 친구를 이용해 먹는 기회주의자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