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사도 바울이 순교한 로마의 세 분수 교회 마당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샛길로 올라가면 작은 수도원을 만나게 된다. 그곳은 남녀 구분 없이 조용히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꼭 우리나라 60년대의 시골 교회 같은 정감 있는 모습이다. 수도원의 건물은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약간 수줍은 듯 동양에서 온 방문객을 받아 준다. 안에는 여러 자매들이 인도자 없이 묵상을 하는 중이었다.

호기심으로 후배 목사와 불쑥 들어갔는데, 그 흔한 의자도 없이 방석들만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구라파에서는 드물고 색다른 풍경이었다. 방석은 원하는 사람은 앉아서 기도하도록 배려한 것 같다. 참으로 오랜만에 방석을 깔고 앉아 눈을 감으니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 옛날의 기억이 아련히 피어 오른다. 매섭게 추운 겨울, 방석 하나만을 의지하여 간절하게 기도하던 시절 말이다.

이 수도원은 프랑스 수도사가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수도함으로 시작했는데, 그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수도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식품이 거의 없다. 즉, 20세기 초에 시작되었고, 수도원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수도 또 곧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제자들이 나오지 않으면 수도원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천 년 가까이 지속되는 수도원은 생명력이 대단하다. 그런 수도원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세상의 화려함을 좇아 경쟁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교회들마다 값비싼 재료들로 최고의 건물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시대 교회는 지극히 화려한데 그 능력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 옛날 교회는 한없이 초라했지만 성령의 능력이 그 얼마나 강력했던가!

중세 어느 교황이 바티칸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면서 “이 시대는 ‘내게 금과 은은 없다’는 말씀은 적합하지 않지요” 했더니 옆에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나 성하, 그 대신 지금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는 능력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베네딕트의 예배당. ⓒ한평우 목사

이 시대 교회가 우선순위를 가지고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겠으나, 과연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싶다. 엊그제 베네딕트의 본산인 카시노(Casino) 수도원에 갔다가 예배당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나 화려했기 때문이다. 평생 검소함을 추구했고 또 가르쳤던 베네딕트가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눈살을 찌푸릴까 싶다. 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의도를 쉽게 넘어서려고 하는지 모른다.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벽은 금으로 빛났고 천장과 기둥머리도 그랬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구라파 교회의 실상이었다. 성소는 결코 화려할 이유가 없다. 한없이 엄위한 구약의 지성소조차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화려함 대신 담백하고 엄숙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성소를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발버둥친다. 그것을 곧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인지 모른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이니 최선을 다해 치장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인본주의적 발상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과연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보다는, 말씀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세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닐까? 지나치게 화려하여 들어가기가 조심스러워지기보다는, 소박하고 질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성소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 옛날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무릎을 꿇고 예배드리던 때가 그리워진다. 서울의 한 귀퉁이에 이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교회는 없을까? 항상 문이 열려 있고 한 귀퉁이에는 손때 묻은 작은 풍금이 소박하게 주인을 기다리는, 담백하고 수수한 민낯으로 사람을 맞던 그 옛날 시골 교회처럼 말이다. 그래서 삶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들이 오가다가 부담 없이 들어가 기도할 수 있는 교회 말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적 교회, 그런 교회의 예배가 그리워진다. 투박하지만 진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조금 촌스러운 설교를 듣고 싶다.

이탈리아의 북구 토리노(Torino)에서 멀지 않은 피아몬테(Piamonte)의 높은 산 앙그로냐(Angrogna)에 가면, 왈도파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 현장이 있다. 그곳은 알프스의 산자락으로, 깊은 계곡이다. 저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바티칸 당국과 무려 6백 년을 치열하게 싸웠고, 2백만 명이 피를 뿌려야 했다. 흐르는 강물은 온통 저들이 흘린 피로 빨갛게 되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왈도파들의 신학교. ⓒ한평우 목사

그 계곡 해발 700-1000m에 저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렸던 바위 굴이 있다. 입구는 좁아 바짝 엎드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일단 들어가면 50-60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그곳에 들어가 유럽 목회자들이 불렀던 찬양은 감격 그 이상이었다. 그 어떤 곳에서 불렀던 찬양과고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왜 그리 아름다운 비주얼에 목숨을 걸고 있나 싶다. 시대를 선도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을 따라가면 더 이상 성령의 능력은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선배들이 앙망했던 그 영성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를 화려하게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먼저 영성을 회복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보다 질박한 교회가 친근감이 간다. 이런 교회가 여기저기 세워져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이 부담 없이 들어와 기도하고, 또는 서러움을 통곡으로 쏟아내고, 확신을 가지고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싶다. 그 옛날 은혜받았던 그 소박한 교회가 그리워진다.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