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운동연구가).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 차원과 경험 차원을 함께 포함하는 ‘성령세례의 양 차원’은, 신자의 삶 속에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이미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교리를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 차원’이 정말 자기들의 삶 속에 적용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만 ‘제2의 축복’ 교리를 되뇌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영적 사실에 대한 앎에 근거해서 성령세례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 나타나기를 위해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 차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한편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교리적 노선의 사람들도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의 능력이 그들의 삶 속에 ‘경험의 차원’으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이에게 ‘당신은 이미 성령세례 받았으니 더 이상 구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때로는 영적 태만을 방치시켜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거듭난 자는 당연히 성령세례의 능력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권성수가 성령세례의 능력과 연관 지어, 개혁주의 체계 위에 서 있는 자신의 성령론을 조정해 보고 싶다고 저서에서 고백한 용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권성수는 말하기를, “필자의 성령론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성찰을 해 보고 싶은 것도 솔직한 고백이다. 성령세례가 최초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필자가 아직 고정되어 있으나, 성령세례가 능력을 수반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일고 있다…… 만일 성령세례가 중생과 동일할 경우, 중생 때에 이런 능력이 수반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성령론이 위와 같이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면, 성령세례는 중생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중생과 일치할 수도 있겠지만, 그 후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권성수, 「종말과 영성」, 100-1)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결’과 관련된 성령세례론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케직(Keswick) 계통은 조화점을 찾게 된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죄성제거설’은 영적 사실의 차원을 강조하는 성결론이다. 왜냐하면, 성결의 근원은 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영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강조할 때 당연히 ‘죄성제거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편 케직의 노선은 경험의 차원을 강조하는 성결론이다. 이 노선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겨나가는가에 대한 차원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죽었다’고 외치더라도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즉 죄의 유혹은 경험의 차원이다.

그렇다면 ‘이미 죽었으니까’의 영적 사실 차원을 적용하여 경험적으로 죄의 유혹에서 승리하는 경험을 사는 것이 바로 이 두 노선의 조화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사실과 경험의 차원은 결코 상호 논쟁의 대상이 아닌, 성령세례의 충족한 이해를 위해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또 한 예를 들어,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토레이(R. A. Torrey)의 ‘성령으로 세례받는 방법’의 절차 내용을 보자. 먼저 그가 제시한 일곱 단계를 소개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하나님으로서 받아들임 (2) 죄를 단념함 (3) 죄에 대한 회개를 완전히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 (4)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맡김 (5) 강력한 갈망 (6) 확신을 가지고 기도함 (7) 믿음(R. A. Torrey,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230-51). 이 내용은 결국 중생 때에 이미 내주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를 보다 철저히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확인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영적 사실의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내용들은 이미 중생 시에 확보되었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도 특히 한국 개혁주의신학 내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성령세례론 양 노선 간의 갈등은, 충분한 조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어느 노선이든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손상되지 않는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에서는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을 보전하고 있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에서는 성령세례의 ‘경험의 차원’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상대방 노선의 강조점을 자신의 노선에 용인함에 있어서 무리가 일어날 리 없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에서의 능력을 확인해 나가면 된다. 한편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역시 ‘성령세례의 경험의 차원’을 삶 속에서 실증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령세례의 양 차원’에 대한 이해는 한국교회 내의 성령운동의 혼잡함과 성령론에 있어서의 불협화음을 치유함에 실제적인 적용성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해에 근거한 성령운동의 확산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적 성령세례의 능력을 한국교회 내에 풍성히 구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