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사람들이 글이나 음악을 통해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영제국의 왕으로, 미국인 이혼녀인 심슨(Simpson) 여인을 사랑했던 윈저 공(Edward 8세, 1894-1972). 그는 영국의 왕은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다는 법 앞에, 왕위를 미련 없이 던져 버리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선택함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 사랑에 감동한 심슨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힘들 때마다 남편 에드워드를 생각합니다. 날 사랑하기 위해 대영제국의 왕관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진 사람, 나를 선택하기 위하여 대영제국이라는 찬란한 명예와 권세와 부와 인기를 포기한 사람, 세상에 그 누가 한 여인을 얻기 위해 그 많은 희생을 치를 수 있단 말인가! 날 선택하기 위하여 그런 엄청난 희생을 감내한 남편 에드워드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불평을 토할 수 없다. 나 같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자가 그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그보다 상상할 수 없이 위대한 사랑을 받은 자는, 바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암울했던 사춘기 시절에 선배를 만나기 위해 교회에 찾아갔다가, 저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랑은 변함없이 나를 감동케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사람과의 사랑은 쉽게 변하지만, 하나님과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개인에게 찾아오심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이런 사건을 “하나님의 특수 섭리”라고 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인생을 찾아 주신 자리는, 잊을 수 없는 은혜의 현장입니다. 신학교 한 동문에게서, “선배가 어느 수도원 바위에서 기도하다가 응답받았다는 고백을 듣고 일부러 그 바위를 찾아가 기도했다”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은혜를 받고 싶어하는 간절한 열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뛰어난 위인이라면, 그가 은혜 받은 장소는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성 프란시스도 생전에 서방 수도원의 창시자였던 베네딕토(Beneditto, 480-543)가 은혜를 경험한, 로마 근교 수비아코(Subiaco) 동굴을 몇 번씩 걸어서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 프란시스가 은혜를 받은 아시시(Assisi)에는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몰려드는 순례객들로 넘쳐나고 있음은, 성도들이 은혜 받은 장소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를 방증합니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선배 어거스틴(Augustine)이 회심한 장소를 찾아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5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사람입니다. 특히 하버드대 철학교수인 화이트헤드(Whitedhead)는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의 전기에는 자신이 회심한 장소를 ‘밀라노의 정원’이라고만 했지, 그 자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가 회심했던 장소가 어딘가에 지금도 보존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론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갖던 중 비슷한 지형을 찾았는데, 바로 카싸고(Cassago)라는 곳이었습니다. 마침 밀라노에서의 모임이 일찍 끝나게 되어, “어거스틴이 회심한 장소를 찾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카싸고라고 했더니 밀라노에서 오래 목회하고 있는 P목사가 “그곳은 50Km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이라고 하여 당장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5월의 푸르름이 사위를 가득 메운 아름다운 시골길을 찾아가는 재미는 환상적이었습니다. 드디어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시골길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어 주차하고, 마침 건너편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방인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자매가 있기에 어거스틴의 정원이 어딘지 물어 보니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다만 그곳은 차가 들어갈 수 없기에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아치로 된 통로를 지나 내려가니, 왼쪽으로 아담한 성당이 있고 그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광장(Piazza)이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 건너편에는 굵다란 쇠창살에 카싸고브리안자시청(Commune di Cassago Brianza)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습다. 그리고 그 간판 아래에는 왼쪽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함께, 갈색으로 ‘어거스틴의 공원’(Parco S. Agostino)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회심을 경험한 ‘밀란의 정원’. ⓒ한평우 목사

즉, 성당의 오른편이 바로 어거스틴이 1천 6백 년 전에 회심한 장소라는 표시였습니다. 그곳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들의 파편이 여러 곳에 펼쳐져 있었고, 담벼락에는 어거스틴에 대한 세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정원은 평평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경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는데, 마니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엄격한 금욕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영혼이 육체의 속박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고기나 술을 멀리하고 식사를 절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어거스틴이 밀란으로 오게 된 것은 이교 세력의 대표자 원로원의 시마쿠스에게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시마쿠스는 어거스틴이 기독교와 사상적으로, 또는 문필로 싸우게 되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어거스틴은 거기서 영적 거성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고 말았습니다(*김명혁, 「초대 기독교의 영성」 P153).

어거스틴은 극심한 영적 갈등 중에 있었기에 밀란의 시 대변인직을 사임하고 친구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거기서도 영적 갈등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에, 마침 담 너머에서 아이들의 동요가 들려 왔습니다. “들어서 읽어 봐”(Tolle lege)라는 노랫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 노랫말을 통해 어거스틴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으셨고, 어거스틴이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성경을 들고 폈더니 로마서의 말씀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 13:13). 이 말씀을 통해 어거스틴은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현장을 방문하기 전에는 담이 높아서 동요를 부르는 아이들을 볼 수 없었을 것으로 상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경사로 이루어진 정원이었기에, 담 너머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어거스틴의 심령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어린아이들의 라틴어 동요 노랫말. 성령께서 그 동요의 가사를 통해 어거스틴의 심령을 강타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만져 주심 때문에 강퍅했던 어거스틴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밀란의 정원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들. ①카르타고에서 로마로 향하는 모습. ②베레콘도 별장에서의 모습. ③압브로시우스에서 세례받는 모습. ⓒ한평우 목사

이제까지 마니교에서 영적 혼돈을 겪었고 갈 바를 몰라 방황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통회의 눈물이 쉴 사이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이제까지의 영적 혼돈과 번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요 구주 되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 모니카 여사는 기쁨과 감사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오로지 아들 어거스틴의 변화를 위해 3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기도하는 동안 세상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온통 회색빛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녀가 경험한 희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밀란으로 데려와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가 누굽니까? 당시 데살로카 주민이 로마의 수비대장을 죽인 사건에 때문에, 황제 데오도시우스(Deodosius, 347-395)가 진노하여 7천 명의 주민을 죽였는데,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그런 잔인한 행동을 엄히 징계했습니다. 즉, 부활주일부터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성찬을 금하고 교회 출입을 불허하자, 황제는 왕관을 벗고 베옷을 입고 눈물로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에 이르러서야 징계를 철회할 정도로 암브로시우스는 대단한 지도자였습니다(이 사건은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라는 사상의 단초가 됨).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암브로시우스가 사역한 교회. 어거스틴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음. ⓒ한평우 목사

당시 어거스틴이 가장 존경하던 주교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했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요 영광이었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혼돈 중에 있었고, 마니교의 교리에 반하여 정욕에 빠져 동거생활로 아이까지 낳은 어거스틴이,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어거스틴은 새로운 결단을 했는데, 그것은 동거해 온 아내와의 결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으로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아내도 슬피 울며 헤어지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워낙 어거스틴의 뜻이 강경함을 알고, 그 여인은 다시는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면서 슬퍼하며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후 고향으로 가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로마의 오스티아 항구로 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로마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출항을 금지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기약 없이 배편을 기다리던 중, 어머니는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팔 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으니, 당시 모니카는 56세요 어거스틴은 33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무를 마친 어머니를 불러 가신 것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아들의 회심을 보고 “나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로마에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평소에 어머니는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고 했지만, 병중에는 “언젠가 부활할 텐데 어디에 묻히든 상관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의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고향 튀니지로 돌아가 수도원을 세웠고, 또한 히포의 감독으로 성도를 돌보며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한 가지 더 첨부할 것은, 그가 영적 거인이 되었을 때 고백록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치부를 공개하는 내용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선언한 입니다.

그의 깊은 학문은 사도 바울의 은혜에 천착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개혁자 마틴 루터나 칼빈, 그리고 존 웨슬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신앙가요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치열하게 은혜를 경험하고 거듭나게 될 때, 그로 인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평범하게가 아니라 영적 깊은 혼란과 번민의 오랜 과정을 헤매다가, 자신을 찾아 오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바울의 은혜 사상에 치열하게 파고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영적 번민의 길을 걸었던 개혁자 마틴 루터와 칼빈, 웨슬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이 회심을 경험했던 정원, 그 자리는 “지금도 편재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에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성령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무지렁이와 같은 저를 만나 주셨던, 고향의 작은 교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다시 한 번 간구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충만케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