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우리들에게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며 돌아보라고 말씀하신다(신 10:18-19, 24:17-22, 시 68:5-6, 146:9).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벨 때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서 한 곳을 남겨 두라고 하셨다. 포도를 딸 때에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서 남겨 두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 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본 것을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4-40).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인 김명혁 목사님은 솔선수범하여 많은 후원금을 내시고 또 후원자들의 사랑의 손길을 모아 지난 19년 동안 연변에 있는 조선족 고아들과 불우아들을 돌보아 오셨다. 한 가정당 월 5만원씩 150-180가정을, 그리고 영재장학금으로 1년에 200여만 원을 5-8명에게 수여하여 대학까지 다니게 하셨다. 김명혁 목사님은 거의 매년 이들의 가정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과 소망을 얻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2007년에 김 목사님과 동행하여 연변에 갔었고, 이번에, 즉 지난 2015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연변의 여덟 지역(연길, 훈춘, 화룡, 용정, 도문, 안도, 왕청)에 다녀왔다. 그 중에서 특징직인 네 가정을 대표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연변사범학생들에게 선물을 전달한 김명혁 목사(앞줄 가운데). ⓒ김명혁 목사 홈페이지

신혜성(여)이는 두 살 때 탈북자였던 어머니가 북한으로 잡혀갔다. 어머니가 없으니 아버지가 아이를 양육해야 했다. 그런데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다. 아빠는 혜성이를 업고 다니며 동네에서 밥을 얻어 먹이기도 하고 죽을 얻어 먹이기도 했다. 아빠는 변변한 직업이 없는데 지금도 폐품을 모아 팔아서 근근이 생활을 한다. 너무나 가난한 가운데 딸을 키웠다. 혜성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장학금을 매월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 가정은 크게 힘을 얻게 되었다. 혜성이는 꾸준히 공부하여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공부를 잘하여 대학도 갈 수 있는 실력이지만, 고등학교만 마치고 취업을 하기 위해 직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2년 더 공부하면 학교를 마치고 디자이너로 일하게 될 것이다. 혜성이 아빠는 여전히 폐품을 모아 팔고 있다. 집 안과 밖이 폐품으로 가득할 때면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것 같이 된다. 거기다가 아빠는 건강이 좋지 않다. 위병이 있고, 맹장도 안 좋다고 한다. 안색이 안 좋고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흰 머리가 솟아나고 있다. 집에 들어가 격려하고 기도해주고 나오는데, 너무나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가슴이 저미어 오고 눈물이 핑 돌았다.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이 절실히 필요하다.

양만복(남)이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탈북자였던 어머니가 북한으로 잡혀갔다. 할머니는 동네에 다니며 젖동냥을 하거나 쌀죽을 만들어 만복이에게 먹였다. 북으로 잡혀간 어머니는 아들 걱정을 하며 세 번이나 탈출해 중국 연변에 있는 집으로 왔으나, 세 번 모두 다시 잡혀갔다. 만복이는 이런 슬픔과 아픔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라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매월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만복이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직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학교를 마치면 자동차 수리를 하는 기술자가 되려고 한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며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다. 집에 있는 텃밭을 가꾸어서 감자, 오이, 부추, 가지 등을 경작하고 있었다. 또한 전에는 절반쯤 무너져 가는 초가에 살았는데, 얼마 전에 집을 새로 지었다. 물론 2만 위안(한화 약 400만 원)의 빚이 있다. 그는 마을에서 본을 보여 이장이 되었다. 구릿빛 얼굴에서는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도와준 것이 무척이나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영원히 감사하다고 한다.

정찬양(여)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5년 동안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극빈자 장학금을 받아왔다. 찬양이는 얼굴이 밝고 싱글벙글했다. 그의 가정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있었다. 아빠인 정수철 씨는 돈을 벌기 위해 러시아로 갔었다. 그러나 돈은 벌 수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신학을 했다. 이를 마친 후 빈손으로 중국 화룡에 돌아왔다. 결혼을 했는데 9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하나님께 자녀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찬양이를 주셨다. 그리고 그 후로 계속해서 찬송이, 예군이, 예진이, 수진이를 낳게 하셔서 다섯 자녀를 두게 되었다. 빈 들에 있는 조그만 땅과 그 위에 있는 낡은 집을 샀다. 집 근처에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시작했다. 집은 비가 오면 샜다. 평상시에도 습기 차고 눅눅한 흙집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아파트 단지로 지정되고 최근에 개발되었다. 아파트 업자는 작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정수철 전도사에게 멋진 아파트 한 채를 주고, 40평짜리 교회도 지어 주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아파트는 14층에 있었는데 아주 멋지고 전망도 좋았다. 개척하고 있는 교회에는 4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최근에는 교인들이 한국으로 많이 돈 벌러 가고 10여 명이 모여서 예배 드린다고 했다. 어떻든 정수철 전도사는 기쁨이 충만했다. 하나님께서 다섯 자녀와 멋진 아파트와 40평짜리 교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어려울 때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도와주신 것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고 하였다. 그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로 인해 놀랍고 기뻤다.

임성주의 어머니는 성주가 태어난 지 두 달 되는 때 북으로 잡혀갔다. 동네 사람들은 성주 아빠에게 두 달 된 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 남에게 주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달 된 성주를 이 집 저 집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에게서 젖 동냥을 하면서 키웠고, 농사를 할 때는 어린아이를 논길에 놓고서 하곤 했다. 결국 성주 아빠는 동네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논밭 가운데 세워진 흙집이 비가 많이 와서 모두 무너져서, 논밭에서 살아야 하는 절망적인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성주에게 새 집을 하나 지어 주었는데, 지금은 그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성주는 꾸준히 공부하여 지금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성주 아버지는 도움의 손길을 편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그리고 자기가 농사한 옥수수와 채소를 훈춘에 있는 어린이집에 자주 가지고 가서 부모 없는 어린이들에게 주곤 한다고 했다. 모두가 고맙고 아름다운 일들이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오래 전에 엄마가 북에 잡혀가서 병중에 있는 아빠와 함께 가난하게 살던 채홍실의 집이 너무 낡아서 무너지게 되었을 때, 새 집을 하나 지어 새로운 희망을 지니고 살게 해 준 일도 있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이렇게 엄마가 북한으로 잡혀가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이들,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라고 있는 어린이들, 엄마가 있기는 하지만 정신지체 장애자로 밥도 빨래도 할 수 없는 가정의 어린이들, 엄마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가정의 어린이들, 부모가 있어도 질병을 앓거나 전혀 일할 수 없는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 지난 19년 동안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서 새로운 소망과 행복을 지니고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학생도 있고, 교사가 된 학생도 있고(이혜란, 박성천), 시인이 된 학생도 있고(박송천), 회사원이 된 학생도 있고(양신복, 엄문길), 외국으로 진출한 학생도 있다(동아려, 염춘희).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도움과 사랑을 받으면서 이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자기처럼 어려운 어린이를 위해 사용해 달라고 첫 월급을 드린 학생들도 있다(엄문길, 이혜란, 양신복. 염춘희).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자면, 이번 연변 방문 5일 동안 우리 일행 6명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고차에 태워 이곳저곳으로 운전한 전문적인 기사가 있었다. 차를 아주 날쌔게 운전하면서 농담도 잘했고, 길을 걸을 때는 담배를 자주 피웠다. 그는 이번처럼 힘든 일정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처럼 감동을 받은 일정도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김태철 운전기사는 5일분 운전 수고비 중 하루 수고비를 돌려주면서, 아주 어려운 신혜성, 양만복, 박해옥 집에 전해주라고 말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참으로 귀중하고 아름답고 값진 일이다. 그런데 요즈음에 후원금이 줄고 있어서 안타깝고 아쉽다. 좀 더 늘 수 있도록 기도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훈춘의 임성주 학생의 새집(다 허물어져 가던 흙집이었는데 홍수로 집이 무너져, 2010년 한복협이 후원해 새로 지어 줬다)에서 이옥기 목사(맨 왼쪽) 등이 기념촬영했다. ⓒ김명혁 목사 홈페이지

개인적으로는 김명혁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동행하면서 목사님의 내면에 있는 사랑을 배웠다. 여덟 개 현을 다니는 고단한 일정이었지만, 김명혁 목사님은 어렵게 사는 어린이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대화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다. 단순히 구호금만 전달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분들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계셨다. 외롭게 지내고 있는 어린이를 꼭 안아주시고, 대화해 주시고, 자신의 지난날의 삶을 말씀해 주시며 소망을 갖도록 도우셨다. 풍성한 식사를 대접할 뿐 아니라 개개인에게 알맞게 추가적인 도움을 주시고, 초콜릿과 스티커를 주시기도 하셨다. 강금화가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담임선생님이 우리의 저녁 식사 모임에 못 가게 하자, 금화가 미쳐 버리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들으시고, 목요일 저녁 학교에까지 찾아 가셔서 안아 주시며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힘을 주고 오셨다. 나는 김 목사님의 이 모든 것의 동기가 순수한 사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 김 목사님을 열정적이 되게 하고, 비포장도로도 덜컹거리는 차를 몰고 막 가서 고아를 방문하게 하고, 활력 있게 사시게 함을 배웠다. 사랑이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생명을 살리고, 키우고, 유능케 하고, 빛을 발하게 함을 배웠다. 나도 이를 배워 사랑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총무 이옥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