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구 장로(바른구원관선교회).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칭의 구원’을 얻은 신자가 이후 즉시 사망한다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십자가에서 죽었던 사람처럼 천국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칭의 구원을 받은 거의 모든 신자들은 여생을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삶 속에서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1)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 공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칭의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가 없이는 구원을 상실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가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성화를 이루어 감이 없이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행위만을 강조하며 죽은 사람에게 면죄부를 팔던 비성경적 가톨릭’에서 해방된 개혁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그리고 칼빈의 ‘예정’과 ‘견인’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치중하여 인간의 책임과 행위를 홀시함으로써, 원래의 종교개혁이 담고 있었던 거룩함의 소명은 점점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출간된 1536년 이후 100년 동안, 개신교 신자들은 불신자들보다 더욱 세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반성하여 1636년에 웨스트민스터신조가 제정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추구하는 퓨리터니즘운동이 전개되면서, 개혁교회 주류에 거룩함의 소명, 성화의 삶이 부각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복음운동 전개로 성화의 교리를 크게 진전시켰으나, 그가 1725년에 성직자 활동을 시작한 것에 비추어, 그의 복음운동이 전개되기 근 100년 전에 퓨리터니즘운동의 중심이었던 스코틀랜드장로교회에서 성화의 교리가 이미 빛을 발하기 시작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장로교회는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으며,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기 전까지는 장로교회 헌법에 규정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사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신조를 지켰습니다. 경제개발 추진을 수반한 물질만능주의가 한국사회에 팽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형교회 목사들이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하여 신자들의 구미에 맞춰 강단에서 ‘칼빈의 예정과 견인론’에 뿌리를 둔 ‘한 번 구원 영원 구원론’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50년 동안 장로·집사가 사기를 치는 일에서부터 대형교회의 목사가 여신도와 간음을 범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타락하여 왔습니다.

신실한 교인들은 죽어가는 한국교회를 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007년 옥한흠 목사가 변질된 복음을 가르쳐 왔음을 회개함으로써 그러한 기도들이 응답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최근 분당우리교회의 이찬수 목사를 비롯한 몇몇 중대형교회 목사들이 성화의 교리를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에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서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주하시어 우리를 돕고 계심을 빌립보서 2장 13절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소원, 즉 의지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의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말씀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는 소원과 강력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소원이 미약하거나 의지가 약할 때에는 기도하여 성화의 삶을 살려는 강력한 소원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전지성과 전능성을 알고 믿는 신자에게서 우러납니다. 비밀스럽게 지은 죄나 마음으로만 지은 죄도, 그리고 신자의 남모르는 선행과 헌신도, 하나님께서는 모두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복 주시지만 공의로 지옥 불에 떨어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속성과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알고 믿는 확실한 신자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만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예정과 견인론을 믿는 칼빈류의 신자들은 결코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사탄은 우리들이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진력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 니다. 대중문화의 대표 주자인 3S(Sex, Sports, Screen)는 사탄이 우리를 지옥으로 이끌고 가는 수단들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동성연애자들이 스스로를 자랑하고 있으며, PCUSA 같은 교단이 동성연애자를 목사로 안수하는 현실은, 사탄의 발호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극에 달한 말세지말에 사는 우리들은, 말씀과 기도로 사탄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본회퍼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을 부르실 때, 나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 그것은 항상 같은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 그의 부르심에 따른 옛사람의 죽음. 곧 옛사람을 죽여 감으로써만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싸우는 사람은 승리의 면류관을 결코 얻을 수 없다….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서만 천국을 쟁취할 수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낳고, 생각이 마음을 낳습니다. 우리는 세상 문화의 전달 매체인 드라마, 영화, 음악, 그리고 스포츠 등을 선별적으로 즐겨야 합니다. 거룩함은 원래 세상과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마음을 낳고 마음이 행동을 낳으며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성품을 바꾸게 됩니다. 우리가 꾸준하게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습관화시킨다면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이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령의 열매로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닮아 간다면, 죄짓는 횟수나 그 흉악도가 낮아질 것이며,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서 마침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찬송가 493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공통된 고백이고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 찬송가 493장을 불러보세요. 기쁘지요, 즐겁지요, 행복하시지요?

우리 모두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성령님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성화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여 종국적인 구원인 영생을 얻도록 합시다.

[한국교회에 희망의 빛이 보인다]

<영원한 성공을 주는 온전한 복음> 저자 김병구 장로(바른구원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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