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광야’를 경험해 보지 않은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성경 ‘욥기’는 그 고난에 대한 일종의 교과서로 자주 인용된다. 책 「고난돌파」의 저자 조봉희 목사(서울 목동 지구촌교회 담임)는 욥기의 주제를 “고난에 대한 사람의 인내”가 아니라, “우리가 고난 테스트에 합격하기까지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라고 해석한다. 그는 일평생 육체의 고통을 짊어지고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며 성공적인 목회를 꾸려가고 있다. 그의 사역 방침과 그가 생각하는 고난의 실존적 의미를 두 번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주

▲조봉희 목사(서울 목동 지구촌교회 담임). ⓒ고영웅 기자

-목사님께서 이번에 내신 책을 보니 고난을 강조하셨는데, 이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사는 게 고난이지요. 제자훈련을 하거나 성경공부 내지 심방을 통하여 개인적인 삶을 나누다 보면, 사연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인간의 고난의 흔적이 산적해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픈 자와 고난당한 자를 찾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고난은 사실 죄 때문입니다. 죄와 고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난을 당하면 죄를 돌아보게 되지요. 제가 고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저의 경험에 의해서입니다. 저는 입대할 때 공수특전사로 차출되어 갔는데, 거기서 요추 골절을 당했습니다. 70년대만 하여도 군기가 세고 특전사이다 보니, 허리가 너무 아파서 서 있지 못할 정도인데도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통합병원에 갔는데, 정형외과 의사가 엑스레이를 찍어 보더니 ‘자네는 허리뼈가 부러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서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곧바로 입원하고 통뼈를 만들어 이식시키는 수술을 했습니다.

대수술을 했지요. 일반적으로는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는데, 당시에 새 방법이 개발되어서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철심이 아니라 자신의 뼈로 만들어 붙이는 신기술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패한 수술이었습니다. 철심을 박으면 수술이 잘못되어도 재수술을 하여 고칠 수 있는데, 제가 받은 신기술 수술은 그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큰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허리 부상으로 퇴원 후 조기 제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제대를 2주 남기고 갑자기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제대할 때 군에 오셔서 잔치를 해준다고 하셨는데, 주무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 토론토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도 책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또 허리를 다쳐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현지에서 하루에 100달러씩 하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요양차 온 것이었는데, 그 후 캐나다로 다시 가지 못하고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뭘 원하셔서 이 고난을 주셨습니까” 질문해야

-육체적 고통 때문에 고난 문제에 더욱 천착하게 되신 것 같습니다.

“아픔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리 부위의 수술이 실패해서 등판이 굉장히 당기는 현상이 생겼고, 이에 따라 목뼈도 C자가 아니라 일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목 디스크로 인한 수술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허리 통증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목 통증이 심했습니다. 이렇듯 통증이 제 인생의 일부가 되니, 설교 때에도 고통의 문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집중하다 보니 욥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욥기서가 성경의 책 중 고난에 대해 가장 깊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욥은 왜 자신이 그러한 고난을 겪어야 되는지 질문을 했지요. ‘Why me?’라고. ‘하나님,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종전의 회의적인 질문이 아니라 긍정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고난을 당하면서 회의적인 질문을 해 봤지만,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더 이상 해답이 없는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나에게 무엇을 원하셔서 이러한 일을 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답이 있는 질문을 해야지만 운명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회의적인 질문을 하게 되면 교인들이라도 팔자 타령을 하거나 운명론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관해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므로,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섭리의 빛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저는 성도에게 인생은 하나님의 퍼즐이라고 합니다. 하나하나 끼워 맞추다 보면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나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전체 그림을 그리시는 분은 하나님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림을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는데, 현대인이 급하다 보니 답부터 찾으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그림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봉희 목사. ⓒ고영웅 기자

성공은 “○○ 때문에”가 아니라 “○○ 덕분에” 이뤄져

-조급함이나 편견, 그리고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출발을 어디서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하는데 나로부터 출발하니까 나중에 오리무중이 됩니다. 탈무드에 나와 있듯이, 짐을 주시는 하나님은 힘도 겸하여 주십니다. 나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신다면, 그것을 질 어깨도 주십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 줍니다. 사도 바울도 엄청난 고난이 있었지만,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 덕분에 그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나의 인생은 ‘○○ 때문에’ 망친 것이 아니라 ‘○○ 덕분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사업가인 고노스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고난 덕분에’, ‘약함 덕분에’, ‘못 배우고 가난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난 덕분에 더 큰 그림을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약간의 간질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거룩한 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거룩한 병 덕분에 훌륭한 문학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해서도 창조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고난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내 삶을 창조적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너무 염세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변합니다. 저도 겉으로는 튼튼해 보여도, 통증이 너무 심하여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고통 덕분에 저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허리나 목 통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 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시지요? 저는 비행기 안에서 1/3 이상은 서서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힘 주시고 은혜를 주시니 해외 집회도 다니면서 사역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은혜의 과정’ 깨달으면 모든 고난이 긍정적으로 변화

-고난을 인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갖고 있는 패턴 중 가장 쉬운 것이 인과응보식·율법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공식적이지 않습니다. 도그마로 규격화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은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 단어를 좋아합니다. 첫째는 섭리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은총적 해석입니다. 율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고 모든 것을 은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고난을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을 때 엄청난 힘이 생겼습니다. 헨리 나우웬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가는 은혜의 과정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모든 고난이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욥기를 해석한 것입니다. 욥은 인간적으로 볼 때 흠 하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욥의 집안은 명품 신앙의 가문인데, 자식들이 사고로 모두 죽는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죠. 욥은 처음에는 이유를 알지 못하여 항변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 은혜를 알게 되지요. 이것이 ‘고난돌파’입니다. 아이가 넘어지면 한국 엄마들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바로 달려가서 일으켜 세우지만, 서양 엄마들은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 뒤 일어서면 격려하고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징징거리면 바로바로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그 힘으로 이겨내도록 하시는데, 그것이 고난돌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때 더욱 세밀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고난을 돌파하라는 숙제입니다. 이 숙제를 풀어 나가는 것이 고난돌파입니다. 현대 교인들에게는 좀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신다”는 목적론적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답을 나에게서 찾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주권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모든 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는 것이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 종말론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영원한 내세, 그런 종말론적인 관점,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땅에서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풀 수 없는 것은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서로 나란히 보면 해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려다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의 정점은 종말론적 관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