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마지막 과정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인간 창조이기보다 한 가정의 창조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 1:27). 그런 점에서 인간 역사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인간의 창조를 제시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자카르’와 ‘네케바’인데, ‘남성’과 ‘여성’이라는 뜻으로 사람 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강조하는 인간은 성적으로 구분되는 남녀의 창조를 강조한 것이다.

그에 비하여 창세기 2장의 ‘남자’와 ‘여자’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창 2:23).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이쉬’와 ‘잇샤’인데, 이는 ‘남편’과 ‘아내’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곧 부부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두 남녀이다. 그런 점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담을 만드시고(창 2:7), 후에 그 아담을 통해 그의 아내를 만드신 것(창 2:22)에 잘 드러나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후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면 한 가정의 중심인 남편과 아내로서의 인간은 어떤 관계로 정의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남편과 아내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취한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오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 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했다. 이는 남편과 아내 사이를 이어주는 사랑에 대한 최고 최대의 표현이다. 가정은 사랑의 끈으로 묶인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지내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결코 나눌 수 없다(창 2:24). 그것은 예수께서도 강조하신 점이다(마 19:6; 막 10:9).

창세기 2장은 사랑으로 한 몸이 된 이룬 아내와 남편을 ‘돕는 배필’(2:18)이라고 규정한다.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제르 케네그도’인데, ‘도움’이라는 뜻의 ‘에제르’와 ‘그와 마주보고 서 있는 것 같다’는 뜻의 ‘케네그도’가 합친 합성어이다. 전자는 ‘돕는’으로, 후자는 ‘배필’로 번역하였다.

부부는 인격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관계이다. ‘케네그도’가 그런 점을 잘 드러내 준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피조물이며,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에 비하여 ‘도움’을 의미하는 ‘에제르’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기능적 분담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인격적 동등성 위에 서 있지만, 가정의 효율적인 유지와 조화를 위하여 서로 다른 기능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인격적 동등성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에 대한 강조라면, 상호보완성은 서로 다른 역할에 대한 인정과 존경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한 것이, 곧 다른 사람의 역할에 대한 인정과 존경을 지적한 것이다.

‘돕는 배필’에서 ‘배필’은 기본 바탕이고, ‘도움’은 그 바탕 위에 드러난 실제라고 할 수 있다. ‘돕는 배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제르 케네그도’에서 ‘케네그도’는 선행 명사인 ‘에제르’를 수식하는 전치사구이다. 이는 ‘에제르’가 이 단어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곧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상호보완성의 ‘도움’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부부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면, 사랑에 근거한 인격적 동등성이 바탕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고 하면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엡 5:28)라고 한 것도 그런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서로의 ‘도움’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과정이지 상하로 구분되는 계급적 관계에서의 복종이 아니다. 그것은 남편의 아내 사랑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