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폭스의 일기

조지 폭스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472쪽 | 18,000원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 폭스(Gorge Fox, 1624-1691)는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는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열아홉 살에 집을 나와, 4년간의 구도여행을 통해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1647년경부터 설교를 시작하여 ‘내면으로부터의 빛’에 의한 구원을 전하며, ‘진리의 벗’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퀘이커파(친우회, 또는 종교친우회)는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퀘이커 신도 윌리엄 펜이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퀘이커교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의 「일기(The Journal of George Fox)」는 웨슬리의 「일기(Journal)」나 뉴먼의 「나의 생애를 위한 변명(Apologia pro Vita Sua)」과 같은 부류의 책으로 간주되어 왔다. 폭스의 글은 이런 종류의 글 중 원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신앙의 고전에 포함할 만한 무게를 지니기도 했다.

최초로 발행된 폭스의 「일기」에는 그에 관한 증언과 회상이 있는데, 편집자인 토마스 엘우드(Thomas Ellwood)와 폭스의 미망인,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 윌리엄 펜(William Penn)의 증언도 함께 실려 있다. 윌리엄 펜은 폭스를 1669년부터 알았는데, 펜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알았을 뿐 아니라, 직접 그와 오랫동안 내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일기」는 처음부터 널리 배포되었다. 그는 「일기」를 자신의 재산으로 인쇄하여, 사본을 세계 곳곳에 정착한 친우회 공동체에 무료로 보내라는 지시를 남겼다. 인쇄된 책들은 집회 구성원들이 돌려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책을 걸어 두는 집회도 더러 있었다.

초판 발행 이후인 1694년에는 다른 편집본들이 많이 나왔다. 「일기」는 다른 퀘이커교도의 책들처럼 처음부터 완전히 유럽 대륙의 언어로 번역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2세기 동안 영국과 아메리카에 있던 퀘이커 공동체는 작품 전체를 대륙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폭스의 「일기」는 그 내용이 방대했다. 「일기」는 폭스의 수 년에 걸친 사역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가장 먼저 큰 저항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퀘이커교에서 변절한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친우회에 대해 비평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폭스를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책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일기」나 다른 책들 어디서도, 폭스가 죄의 고백에 대해 전혀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폭스의 반대자들은 폭스가 회개 없이 ‘죄 없는 초인적인 삶’을 주장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한편 조지 폭스의 「일기」는 문학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여러 문학가들이 우연히 폭스의 「일기」를 읽거나 도서관에서 찾아보았고, 아는 친우회 교우로부터 빌리려 했던 것 같다.

대니얼 디포는 런던에 있는 몇몇 친우회 교우들과 잘 알고 지내는 이웃이었다. 그가 자주 다니는 곳은 퀘이커 역사상 유명한 도시 지역과 일치하는 곳이었으며, 퀘이커교도는 그의 소설에서 상당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디포는 퀘이커교를 변호하였다.

프랑스 작가 중 초기 퀘이커교에 관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유명한 사람은 볼테르였다. 볼테르는 그의 글에서 바클레이나 윌리엄 펜처럼 좋은 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폭스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런 언급들 중 더러 어떤 것들은 개략적이지만 폭스의 「일기」에 근거를 둔 것들임이 틀림없다.

대니얼 디포의 시대에서 1세기 후, 퀘이커교는 영국 문학에 깊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런 관심은 퀘이커교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어서라기보다는 퀘이커교를 바라보는 연민 때문이었다. 또 그런 관심을 보인 작가들 대부분이 친우회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었던 까닭도 있었다.

실제로 폭스의 「일기」에 나오는 ‘이상한’ 특징은,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죄를 인식함이 없다는 것은 18세기에 인정되는 전통적 교리에 다소 어긋나는 것이었다. 프랜시스 버그(Francis Burg)는 거듭해서 폭스의 「일기」에 대해 죄의 고백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도 나와 있지 않다고 비난하였다.

폭스는 유혹과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유혹에 굴복했다고 인정하거나 자신에게 회심이 필요하다거나 회심한 사실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폭스 자신은 일기에서 그 자신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주 어렸을 적에 나는 아이답지 않게 진중하고 끈기가 있었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순결함과 의를 알았다. 그동안 순결함을 지키며 행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내게 성경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다. 성경은 내게 아주 소중한 것이긴 했다. 왜냐하면 나는 성령 안에 있었으며 성령께서 성경을 내게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이 내 안에 열어 보이셨고 내가 나중에 발견한 것은 모두 성경과 일치하는 것들이었다.”

폭스는 영국 국교회나 청교도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직접적인 계시를 강조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신앙의 틀에서 상당히 벗어나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좋아했다.

폭스는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인용한 말을 사용하였으나, 자신의 혁명적 사고와 함께 전통적인 용어도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는 직접적 인도를 역사적 계시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면의 빛은 그리스도나 성령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내면의 빛은 성경을 밝히신 영과 같은 영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런 폭스의 말에 학자들은 그가 성경 기록보다 내면의 경험을 우선시하고, 과거의 거룩한 행위보다는 현재의 신앙을 중요시한다고 말하고 있다.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