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의 한 유적. ⓒ성지선교회 제공

한국교회는 교단과 교파을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이단과 사이비와의 싸움을 치열하게 벌여왔는데, 특히 요즘은 대표적 사이비 집단인 ‘신천지(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때문에 거의 모든 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CBS에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방송을 8부작 시리즈로 방송하면서 더욱 거센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

신천지의 교리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는 교주 이만희를 보혜사(保惠師)로 오신 성령이라 믿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주의 백성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예수께서 약속하신 그 보혜사 성령이 유한한 육신을 입은 이만희 자신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정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에 미혹되어 가정과 일상생활을 포기하는 전형적인 ‘임박한 종말론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인 A.D. 431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와 서머나, 버가모 등 에게해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섬기던 대모신(大母神)인 아데미(Artemis)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대체돼 버린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431년 에베소의 마리아기념교회에서 열린 3차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에베소 3차 공의회를 통해, 마리아가 아데미의 빈 자리를 메꾸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 개관

에베소(Ephesus)는 버가모(Bergama)와 함께 ‘에게해의 두 장미’로 격찬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신약성서 ‘에베소서’나 요한계시록 수신지로서 소아시아 7교회 중 하나로 등장하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시대에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면서인데, 수많은 국제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습니다. 에베소의 최전성기는 A.D. 1-2세기경으로, 도시 인구가 30만 명에 달하면서 당연히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항만을 끼고 번영한 상업도시 에베소가 쇠퇴한 것은 카이스터(Cayster)강의 토사 퇴적으로 묻혀가게 되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도 점점 저하돼, 현재 장소(Selçuk)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A.D. 612년의 지진으로 부분적 파괴도 겪으면서, 에베소는 급속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2·3차 선교여행 때 이곳을 방문했고,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성령 강림으로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나 그것을 본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3통의 편지(먼저 쓴 편지, 고린도전서, 눈물로 쓴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기도 했습니다.

▲크레테스 거리. ⓒ성지선교회 제공

에베소의 역사

에베소(Ephesus)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리스 역사가요 철학자인 타키투스(Tacitus)는 흑해에서 건너온 여인(女人)족인 아마존족이 기원전 1,400년경 마을을 처음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보는 에베소가 아마존족 언어로 ‘꿀벌’이라는 뜻의 ‘아빠소스’라는 아마존족 여왕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후 기원전 1,100년경 이오니아인(Ionians)인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레스(Androcles)가, 여인들이 다스리는 아마존 토착민들을 추방시키고 에베소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 많은 그리스계인들이 척박한 그리스 본토와 섬을 떠나 비옥한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버가모, 에베소, 서머나 등)으로 대거 침략해 그리스계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안드로클레스 왕자도 당시 전통에 따라 새 도시를 세우기 위해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생선과 산돼지와 불이 함께 만나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안드로클레스는 에베소 지역에 이르러 바다가 인접한 미지의 땅을 발견하고 부하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던 중,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불똥이 튀어 코레소스(Koressos) 산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숲 속에서 산돼지가 달려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곳을 ‘신이 원하는 장소’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그것을 기념하는 ‘산돼지상’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바로 에베소 원형대극장이 위치한 언덕 쪽입니다.

안드로클레스가 그리스계 이오니아 도시 국가를 건설하면서 에베소는 점차 항구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며 성장하기 시작했고, 후에 페르시아와 리디아 크로이소스 왕의 침략,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 로마제국,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등으로 이어지며, 동양에서 서양으로 또는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출하려는 세계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셀수스 도서관. ⓒ성지선교회 제공

여신 숭배

재미있는 사실은 에베소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대대로 여신을 섬겨 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데미여신전에서는 대모신인 키벨레(Cybele) 여신을 섬겼고, 키벨레의 또 다른 형태인 아데미 여신이 뒤를 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온 후,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에게해 연안 도시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스다롯과 아세라 여신을 섬겼던 것처럼 예전부터 달의 여신인 키벨레(Cybele)라고 하는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에베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키벨레를 전통적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러다 아마존족이 추방되고 아테네에서 이주한 그리스인들이 에베소에 정착하면서, 그들이 그리스에서 섬기던 아데미를 아나톨리아로 가져옵니다. 그때부터 에베소는 다산과 번성을 주관하며 출산과 갓난아기의 발육을 관장하는 아데미를 숭배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에베소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에게해 인근 도시들은 모신(母神), 즉 ‘어머니 신’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항상 사람들 마음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처음 거주자들이 아마존 여인족이었던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3-56년) 도중 에베소에 머물러 약 3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에베소 시민들의 아데미에 대한 신앙심은 떨어졌고 은으로 만든 아데미상의 판매 부진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이에 ‘은장색 조합(Guild)’의 폭동이 일어나고 네로 황제를 비롯한 이후 황제들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데미를 숭배하는 신앙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마리아의 집’ 길목에 세워진 마리아 동상. ⓒ성지선교회 제공

하지만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기독교는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며 퍼져 갔습니다. 바울이 제국 내에 기독교 복음의 씨앗을 심은 후 약 250년이 지난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따라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테살로니키아 칙령’에 따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지정되기에 이릅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그 동안 지하에서 제국의 박해를 피해 몰래 예배드리며 숨죽여 왔던 기독교가 이제는 지상으로 올라와, 웅장하고 아름답게 교회 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리며 나래를 활짝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가며 외면적으로 성장을 해 갈 때도, 아나톨리아의 에게해 인근 도시 시민들에게는 예전부터 그러했듯, 그들의 조상, 조상들의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여신(女神) 혹은 모신(母神)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여신을 향한, 그들에게 내재됐던 욕구와 욕망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431년 에베소 마리아기념교회에서 있었던, 3차 에베소 종교회의가 그것입니다.

제3차 에베소 공의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정식 종교로 공인받은 후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와 메이저급 종교가 되어가면서, 교회는 여러 문제로 내홍을 겪습니다. 주된 이슈는 바로 예수의 신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믿고 있는 ‘삼위일체(Trinity)’나 ‘성육신’(Incarnation) 같은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도 당시에는 ‘뜨거운 감자’였고,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이슈였습니다. 물론 이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327년에 제1차 공의회가 니케아(Nicea, 현재 이즈닉)라는 곳에서 열렸고,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동일 본질’이라는 교리가 확정됩니다. 381년에는 제2차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재 이스탄불)에서 개최되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 신성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마리아는 누구인가?’에 대한 주제를 놓고, 3차 공의회가 431년에 에베소에 있는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개최됩니다.

당시는 성모에 대한 신심이 고조되던 때라 교인들이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으신 분’이라 부르곤 했는데, 사실 이 존칭은 그리스 교부들이 자주 사용하던 관용어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이란 뜻의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로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의 논리인즉, 예수는 신격과 인격을 갖춘 분인데 성모는 ‘인간 예수를 낳으신’ 예수의 어머니지 결코 ‘신(神) 예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키릴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으로 합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안디옥 학파의 대표자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 간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종식시키려, 431년 6월 7일 성모마리아기념교회에서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를 출교시키고, 마리아에게 ‘하나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존칭을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출교된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로 유배되었는데, 436년 사막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동일 본질이다’라는 명제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사고의 지평을 의미 없는 마리아에게까지 넓힌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신성의 원천이 되었다는 해석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마리아 숭배사상이 출발한 것입니다. 제3차 에베소공의회를 통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던 것입니다.

▲제3차 공의회가 열린 마리아 기념교회. ⓒ성지선교회 제공

에베소 공의회 결의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로마의 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로마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단순한 예수의 어머니가 아닌, 그 이상의 신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키릴이 네스토리우스보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는데, 그 능력을 가지고 황제 및 다른 주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관철시키고, 자신의 주장에 반박하던 네스토리우스를 출교시키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전부일까요?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기했듯 에베소를 비롯한 에게해 연간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신에 대한 마음이 항상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들이었으므로, 사람들에게는 이 점이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키릴이 여신을 사모하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혹은 제국교회에서 본인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아니면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 포교의 대상으로 삼아 포교하기 위해, 마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마리아의 신성에 관한 것을 이슈로 부각시켜 안건을 에베소 공의회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공의회에서 마리아 숭배 교리를 공식적으로 통과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에베소 지역은 아마존 여인족이 처음 터를 잡은 후 전통적으로 여신인 키벨레를 섬겨왔고,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이 점령한 후에는 아데미로,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마리아로 여신의 계보를 이은 것으로 보입니다.

제3차 공의회가 열렸던 장소도 여신에 대한 감성이 가장 큰 에베소였고, 에베소 중에서도 마리아기념교회를 공의회 장소로 잡은 것도 어떤 의도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리아의 집. ⓒ성지선교회 제공

마리아의 집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3차 공의회를 통해 로마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간 예수의 어머니’를 넘어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의 어머니’로 지위가 수직 상승되어, 본인의 의중과 상관 없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하나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요즘 같이 교회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항상 이단과 사이비는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적용시키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전의 영지주의나 몰몬교, 현재 신천지·통일교와 같은 대표적인 사이비들도 그렇습니다.

▲원제연 선교사.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믿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앙생활만이, 우리 자신과 가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서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스탄불에서 원제연 선교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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