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원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1.

최고 명절인 로쉬하솨나와 욤키푸르를 준비하면서, 유대인들은 지난 1년간의 행위를 돌아보고 자신이 상처나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때가 언제나 딜레마의 순간이 된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이 사랑하고 신뢰했던 사람들(부모 혹은 배우자)에게서 성적 학대를 받고,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사람들이다. 가해자들은 종종 학대 사실조자 인정하지 않는다. 나아가 일부는 화해를 위한 노력도 없이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다.

다른 유대인들이 ‘용서’를 묵상할 때, 그 피해자들은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아픈 기억들 때문에 오히려 분노와 억울함에 휩싸이게 된다. 더구나 회당의 랍비 선생이 “돌아가신 부모나 배우자의 덕을 기리자”고 말할 때, 그들에게 학대받은 사람들은 더욱 외로움을 느끼고, 그들을 위로해야 할 종교 공동체에게서 더욱 큰 소외감을 느낀다(마르시아 스피겔, 유대인).

#2.

전병욱 목사 사건은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교회 내의 성범죄 문제를 공론화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사죄(謝罪)에 대해 가진 왜곡된 생각의 단적인 표본이 되었다. 전병욱 목사는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죄의 노력 없이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전 목사가 속한 예장 합동총회는 제대로 된 징벌적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들의 상처를 가중시켰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합동총회 인사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누워서 침 뱉는 꼴이다. 좋은 일이면 몰라도, 안 좋은 일은 빨리빨리 덮고 지나가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세력이 많다. 이러쿵저러쿵 애기하는데 전도가 되겠느냐?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교회를 세워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말씀만 세우는 것이고, 부끄러운 일은 그것을 가지고 반성을 하면 된다”(뉴스앤조이 “예장 합동, 법리 앞세워 전병욱 사건 회피”).

아마 전병욱 목사와 합동총회는 죄를 덮고 가면서 충분히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3.

일본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 인정과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우리 일본이 얼마나 더 사과해야 하는가?”라는 짜증마저 느껴진다. 1965년 한일협정에서 위안부 보상 문제는 일단락되었고, 고노 담화를 통해 사죄도 “충분히 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국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만들고 있다.

앞에서 제시된 예는 모두 성범죄 피해 여성에 관한 것이다. 가해자들의 공통적 대응은, 범죄 사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나오면 사과를 한다. 그러나 그 사죄는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일 뿐, ‘진정한 사죄’는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로 인해 피해 여성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 갈 뿐이다.

그러면 ‘진정한 사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데체 어떻게 사죄해야 진정한 사죄가 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가?

‘용서’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제 과거의 원한은 덮고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미 고노 담화에서 충분히 사죄한 위안부 문제 때문에, 일본에게 지속적으로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옳은지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먼저, 위안부 문제는 금전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적 학대를 경험한 한국 여인들의 한에 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경우, 보통 상해법을 적용해 해결한다. 즉 누군가의 차를 고장 내면 그 차를 고쳐주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을 유린한 경우도 일반 상해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문제는 성폭력이 육체 뿐 아니라 영혼에 깊은 생채기를 남기고, 그 생채기는 절대 돈으로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믿었던 목회자에게서의 성적 학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전쟁에 끌려간 위안부들이 당했던 성적 학대가 남긴 가슴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문제는 피해자의 상처가 온전히 치유(heal)됐을 때 비로소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죄’는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계속돼야 한다. 유대적 용어로 환원하면, 진정한 사죄는 ‘피해자의 샬롬’(wholeness)을 목표점으로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당한 상처의 ‘치유’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죄의 의도가 없다고 봐야 한다. 자신은 심각하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사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손해가 올 것 같아 사죄하는 척하는 것이다. 이런 사죄는 설사 받더라도 짜증만 날 뿐이다. 하나님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국면 무마용 회개에 짜증을 내셨다(삿 10:16).

진정한 사죄가 무엇인지는 일반 심리학 책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의 유명 정신과 의사 두 명이 다음과 같은 ‘사죄 십계명’을 만들었다. 이는 ‘용서’를 위한 유대인의 기도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1.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라.
2. 잘못을 일일이 열거한 후 피해자에게 충분한지 묻고, 그 대답에 근거해 자신의 잘못을 다시 나열하라.
3.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 한 번 말하라. 그리고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할 준비를 하라.
4. 피해자가 화를 내도록 허락하고, 그가 받은 상처를 말할 때 경청하라. 피해자가 그것을 원하는 만큼 반복하도록 허락하라. 언제까지? 그 피해자가 “이제는 가해자가 자신의 아픔을 이해했다”고 느낄 때까지.
5. 자신의 잘못이 단순한 사고인지, 부주의에 의한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적 악행인지 피해자에게 솔직히 말하라. 이 부분은 가해자에게 매우 어려운 과정이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부주의”라는 말은 종종 자기를 지키기 위한 핑계일 경우가 많으며, 의도적 악행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6. 철저히 낮은 자세로 용서를 구하라. 죄책감, 후회, 슬픔 등을 표현하라.
7. 이 사건에서 새롭게 배운 교훈을 솔직히 설명하라.
8. 그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라.
9.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될 때, 어떤 벌을 받을 것인지도 말하라.
10. 다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라.
(Brash and Lipton, Payback: Why we Retaliate, Redirect Agression, and Take Revenge[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191-192)

브라쉬와 립톤은 이 사죄의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 사죄 절차의 원리는 가해자를 겸손하게 만들고, 가해자로 하여금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하고 피해자의 상처를 보상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에게 (상징적으로) 지우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사죄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요셉을 대상들에게 팔아넘긴 형들이 후에 요셉에게 사죄할 때, 그들은 자신을 과격하게 낮추었다.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창 50:18)”. 그들의 사죄에는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에게 회개할 때도 자신을 철저히 낮췄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신하들이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3단계 방법이 나오는데, 가장 마지막에 사용하는 표현이 “천인공분”이다. 이 말은 왕이 하는 일이 하늘과 사람을 모두 화나게 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리킨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사죄할 때,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과 아버지 모두에 대한 죄, 즉 천인공분의 죄임을 말한 것은 자신의 행위를 최악으로 낮춘 것이다.

한편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사죄는 피해자 다윗의 상처를 정확히 치유해 주는 것이었다. 나발에게 음식을 얻으려다 인격적 모독을 받은 다윗이 그의 가족을 진멸하려 했을 때, 아비가일의 진정한 사죄가 가족 모두를 살린다.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서둘러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서 그의 얼굴로 엎드려 땅 위에 부복했다.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탓입니다. 주여.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해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입니다…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들었고, 네 얼굴을 높여 주었다(삼상 25:23-28)”.

위기를 감지한 아비가일은 사죄를 위해 매우 단호하게 행동한다. 23절에는 “보다”, “서두르다”, “내리다”, “엎드리다”, “절하다” 등 무려 5개의 동사가 스타카토처럼 이어지는데, 사죄를 위한 아비가일의 주저없는 움직임을 잘 표현한다. 다윗의 발에 엎드린 아비가일은 “내 탓입니다. 주에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을 매우 모욕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남편 나발이 다윗의 이름을 모욕한 것을 염두에 두고, 다윗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다윗의 사환들이 “다윗의 이름으로” 나발에게 문안하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요즘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라며 다윗을 무시했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이름을 모욕함으로, 상처받은 다윗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이어 27절에서는 다윗의 부하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나발의 악행으로 인한 다윗의 상처를 치유한다. 27절에서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가져온 “예물”은 히브리어 브라카(축복)를 의역한 것이다. 아비가일은 양털 축제 중 나발을 ‘축복’(브라카)하기 위해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던, 다윗 부하들의 상처를 축복 예물(브라카)을 통해 치유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사죄의 과정 가운데, 아비가일은 몇 번이고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23절에서 다윗의 분노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 아비가일은, 25절에서 자신의 불찰을 다시 고백하고, 28절에서 세 번째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어떻게 보면, 잘못한 것은 나발이지 아비가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잘못을 인정한다.

이에 다윗은 아비가일의 선물을 받고, 그에게 용서를 선포한다, “평안히(레 샬롬) 올라가라.” 여기서 아비가일에게 선포한 “샬롬”은 아비가일의 진정 어린 사죄로 인해 치유된 다윗의 “샬롬”이 아비가일에게 메아리친 것이다. 샬롬의 ‘공공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아비가일은 자신의 잘못을 다윗이 납득할 때까지 고백하고, 자신이 잘못으로 인한 다윗의 상처와 피해를 치유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다윗이 그녀의 사죄를 받았을 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요약하면, 진정한 사죄는 피해자가 받은 상처의 치유, 피해자의 샬롬을 목적점으로 한다. 이를 위해 사죄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지키기보다 철저히 낮아져야 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고, 피해자의 상처가 회복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이제는 충분하다고 말할 때까지 “제가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어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특히 사랑하고 신뢰한 목회자에게서 당한 성적 학대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전쟁터에 끌려가 당한 여성들의 성적 학대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가해자들의 사죄는 그 상처의 치유가 온전히 치유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 정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은 의지적으로 사죄할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필자가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한국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인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일본이 위안부 문제로 사죄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일본의 한 양심이 이미 줬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진정한 사죄는 피해자가 납득할 때 끝난다. 피해자가 이제 됐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 옳은 이야기다.

아베 총리가 지향하는 ‘자랑스러운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감추는 형태로 구현된 사실을 보면서 마음 한편이 씁쓸한 이유는, ‘자랑스러운 기독교’를 위해 목회자의 치부를 덮는 데 급급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겹치기 때문이다. 우리 이웃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교회에게서 더욱 소외되어 버리는 현실이 다시는 없도록 하자.

나라가 약하여 억울하게 고통받았던 우리의 어머니들, 그 멍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온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의 진정한 사죄로 마음에 샬롬을 되찾을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함께 손을 모으자.

/김구원 교수(개신대학원대학교, <사무엘상 주석> 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