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고 그의 영이 죽었고 속사람이 버림을 당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은고로 그의 영이 죽었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져 하나님 사람이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점차 죄에 속박되어 마귀의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하나님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이 되었고, 보통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어 마귀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본론>

1.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대결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대결에서 이 사실을 우리는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모시고 살도록 하나님이 택한 민족인데 타락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로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 블레셋 이방민족과 대결되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떱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움을 싸울 때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마귀의 백성과의 싸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인 사울왕은 똑같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인 골리앗과 대결해서 싸우자니까 인간의 감각으로 보니까 상대가 안됩니다.

골리앗이 외모로 어떠냐면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으로 약 3m 가까운 키입니다. 제가 골리앗 앞에 서면 골리앗은 나보다 두 배 반이나 큰 키를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키 큰 사람하고 같이 지내는 것 상당히 괴롭습니다. 우리 친구 한 사람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다가 키다리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그 친구를 만나서 그 부인하고 같이 보면 친구가 부인하고 키스 한번 하려면 하늘을 쳐다봐야 되고 위에서 병아리에게 모이 주는 어미닭같이 이렇게 내려다 봐야 되는데 우리가 놀리기를 많이 합니다.

키가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은 머리에 놋투구를 쓰고 57kg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어깨 사이에 놋단창을 매고 베틀 채 같은 창자루를 들었는데 그 창날이 무려 1,600세겔 약, 7킬로그램이나 되었습니다. 그런 골리앗의 어마어마한 몸에 비교해서 사울은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골리앗이 사울의 눈을 가리워서 하나님은 안 보이고 사울만 봐요. 골리앗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8절로 10절에 보면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 17:11)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갖가지 사울과 같은 문제의 골리앗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의 골리앗이 너무 커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포기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힘에 겨운 문제가 오면 포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 3포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데, 무슨 말이냐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취직을 못하니까 결혼도, 출산도 다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문제 앞에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로서, 33분에 1명꼴로 생명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보는 동안에도 한 사람이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다 이길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골리앗에 밀려서 사울왕이 절절맬 때 여기에 다윗이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군대에 동원된 형들에게 문안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다윗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목축이나 하지 전쟁 구경하러 왔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잘 믿는 소년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눈으로 골리앗을 보니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이 큰 고깃덩이리로 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인 골리앗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세워 놓으니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다윗이 어림도 없습니다만 실제로 보면 다윗은 하나님과 같이 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골리앗은 인간적인 골리앗입니다. 절대로 골리앗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인 골리앗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쟁을 하면 이미 전쟁은 끝난 것과 같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6절로 47절에 보면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아예 간이 배밖에 나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먹을 가지고 싸우기 전에 말싸움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말싸움에 이겨야 주먹싸움에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벌벌 떨고 있는데 17살 정도밖에 안 되는 초립동인 다윗이 나가서 아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소리를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하나님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과 자기가 손에 손잡고 함께 일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하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하면 감각적으로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 앞에 큰소리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눈을 밝히 떠서 하나님 앞에 막힌 담이 없어야 됩니다. 우리가 교회 왔다갔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앙생활 할 때라도 절대로 사람 만든 울타리가 우리 눈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해 실시된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한국에 결혼한 가족 중의 아내의 70%가 결혼 후 남편에게 실망을 했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남편과 결혼했는가? 실망을 할 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하지 왜 그랬는가?’를 물으니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 1위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아일보, 2014.9.1.)

그래서 내 생각이 우리 아내도 눈에 꽁깍찌가 끼어서 조용기 같은 사람과 결혼해서 살면 큰일 아니겠는가.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겁이 나서... 콩깍지는 콩을 떨어내고 남은 껍질인데, 반투명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을 가려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눈에는 골리앗이 콩깍지였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골리앗이 눈앞에 딱 서서 가리워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말싸움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3. 말의 에너지

다윗은 대단히 담대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야훼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34~37).

굉장히 긍정적이고 담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골리앗이 이 다윗의 말을 듣고 말에 응전해 나왔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삼상 17:44) 다윗이 거기에 대한 도전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이 두 사람의 입씨름에 여러분 무엇이 다릅니까? 골리앗은 자기 스스로 인간적인 힘에만 의지했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하나님께 의지해서 하나님과 함께 전쟁에 나가지 인간의 힘을 의지해서 나간다고 말 안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다른 것은 여기는 그냥 사람으로서 골리앗이 오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리앗 한 사람 오는데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대결해 나가니 패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골리앗같이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항상 말씨름에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말로 나는 안 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 힘이 없다. 그러면 벌써 그 말로 말미암아 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이긴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그 말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못 봤죠? 여러분! 하나님을 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를 들었잖아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설교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시인하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우리와 같이 하시고 우리가 꿈을 가지면 꿈을 통해서 같이 계시고 우리가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같이 계시고 입술로 담대히 고백하면 그 고백 속에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하는 말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조용기가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기가 하나님을 모시고 와서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용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달하는 말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대단한 간증을 일본 오사카에서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 30세가 조금 넘은 젊은 주의 종인데 주의 종이 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것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뇌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뇌 중심에 암이 자라기 때문에 수술할 도리도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날이 갈수록 몸의 기능이 떨어져서 나중에는 눈도 깜박 거릴 수 없고 씹을 수도 없고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더구나 하루종일 누워 있어야 되는데 노래나 세상 잡다한 이야기 프로그램 같은 텔레비젼을 틀어 놓으면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누님이 제가 일본에서 가졌던 부흥회 설교하는 테이프를 틀어주는데 이 테이프를 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구역질이 안 납니다. 그래서 구역질이 안 나기 때문에 제 테이프를 수백 번 듣는데 거기에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들어있어서 수백 번 들었으니까 교회 나간적은 없지만 테이프를 통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그 다음에는 기도를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나는 나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치료받았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아프다는 말 안합니다. 이제는 약으로 치료할 수 없으니까 약도 소용없습니다. 그는 건강하다. 나았다. 나을지어다. 건강할지어다. 그랬는데 하루는 자기 마음속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보자. 내일이면 나의 눈이 보일 것이다. 깨끗이 나을 것이다. 잠에 들어가면서 나는 나았다. 건강하다.

그리고 그 이튿날 잠에서 깨니까 눈이 환하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희한하다. 그러면 내일이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아서 입술에 말할 수 있다. 말을 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자고나니까 말이 돼요. 그래서 기도하니까 수족이 다 움직이게 되고 완전하게 되어서 병원에 찾아가서 보니까 의사선생님이 이런 일은 의학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 우리에게는 오지 마라. 그래서 너무 감동이 되어서 그 길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는데 그 간증이 너무 놀라워서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격려가 될까 싶어서 그 간증을 가지고 제 사무실에 맡겼습니다. 아마 순복음지에 간증이 나올런지도 모릅니다.

저는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인간으로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 귀로써 직접 듣지도 못했지만 설교 중에서 나오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 말씀을 믿은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듣고 읽고 해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붙잡으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붙잡힌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육신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다윗에게 말할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전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도전적인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할 때 바라는 것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재있는 상황을 보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 나는 못한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고달프다. 나는 현재 병들었다. 현재 일어나는 것을 보고 말하면 현재 감각을 따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고 말하는 것은 현재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잘될 것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나았다. 건강하다. 이것은 현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될 것을 현재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믿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자녀가 맘에 안 든다고 “넌 싹이 노랗다.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싹이 노래요. 노란 것을 보고 노랗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싹이 노란 애라도 “너는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것이다. 사업가가 될 것이다.” 현재는 안 그런데 그런 것처럼 말합니다.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바라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증거가 현재 안 그런데 그런 것처럼 입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디슨 같은 애를 보면 학교에 가서 너무나 잘못하기 때문에 선생이 가르칠 수가 없어요. 교장 선생이 그 어머니를 불러다가 이 아이는 아주 바보니까 우리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고 데리고 가라고 할 때 이 어머님은 “우리 애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아이큐가 높고 머리가 좋은 애입니다. 다른 애들이 다 모자르니까 우리 애가 같이 있을 수 없을 따름입니다. 좋습니다. 내가 교육하지요.” 그렇게 학교를 중퇴하고 나온 그 애를 어머니가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된다. 해 보자”고 한 결과에 오늘날 세계 에디슨과 같은 발명왕이 어디 있습니까? 위대한 사업가요, 발명가가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으니, “바라는 것들”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장차 될 것을 바라보고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장차 될 것을 바라보고 명령하고 선포하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의 공격을 받아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하루만 날이 더 길면 적군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 후 해를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 10:12) 그러자 그 순간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 순간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기 때문에 마침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에 있는 적과의 대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벽 주위를 돌고, 여리고 성을 향해 크게 소리치며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향해 담대하게 명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너의 질병은 물러가라! 원수야 떠나가라! 너희 사업아 형통하라! 너희 불행아 사라져라! 행복이 다가오라! 기쁨아 나타나라! 명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명령을 하면 말씀이 나가서 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향해 담대히 명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 19절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야훼가 말하노라”. 한 번 따라 말씀하세요.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야훼가 말하노라.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입술을 받아서 그 말을 가지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입으로 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말의 열매를 창조하셔서 우리 삶에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인생이라는 밭에 “말”이라는 씨를 심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을 심으면 긍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고, 부정적인 것을 심으면 부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가 여러분 바로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잔뜩 말해놓고 난 다음에 긍정적인 열매가 맺어질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말을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서 매일같이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들어와서 거할 수 있는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지킬만한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마음의 생각을 지키면 하나님은 그 생각 속에 들어와서 같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이 그 생각 속에서 온갖 일을 다 하시지요. 생각은 눈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눈에 안 보이지 않습니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내 안 보이는 생각 속에 와서 성전삼고 계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함께하심

그 생각에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 생각과 같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넘치게 한다. 생각이 그릇이 되고 그 생각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넘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귀한 것입니다. 그 생각이 십자가 대속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으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기대하는 꿈이 있지 않습니까? 소원하는 마음의 꿈이 긍정적이어야지 실패하고 파탄에 이르는 꿈을 가지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승리하는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니까 무엇을 하나 종국적으로 이기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얻는 꿈을 꾸어야 되고 사업을 잘하는 꿈을 꾸어야 되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안 되는 꿈을 꾸어야 되고 그러면 꿈 자체를 여러분 못 보았지요? 안 보이는 하나님께서는 안 보이는 우리의 꿈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꿈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마음에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믿음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안 보이는 믿음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뭡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현재 있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현재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내가 바라는 장차 그것을 있는 것처럼 말할 때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이 만물을 지었다고 우리가 말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사카에 있는 그 젊은 목사처럼 암으로 죽어가고 치료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건강을 얻었다. 나는 튼튼하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매일 고함을 치고 말하고 잠자리에 들어가고 여섯 달 동안 그렇게 계속하니까 몸에 암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믿음이란 현재 보는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보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주님의 말씀은 눈에도 안 보이지요.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명령입니다. 창조적인 명령을 하는 것 이것이 또한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말이 안 보이는 것이니까 안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수용 못합니다. 생각은 눈에 안 보이는데 안 보이는 하나님이 생각을 성전삼고 꿈은 우리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이 성전 삼고 믿음은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이 성전 삼고 창조적인 말도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이 성전 삼는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이 우리 인간 속에도 눈에 안 보이는 무한한 성격의 존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안 보입니다. 그것 하나님이 좋은 성전이지요. 꿈도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안 보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성전입니다. 믿음도 안 보이니까 좋은 성전이고 창조적인 말도 안 보이니까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성전 삼고 와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품고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품에 품고 기도를 하고 꿈을 품고 기도를 하고 믿음을 품고 기도해야 되고 창조적인 말씀을 품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기도가 하나님의 손을 위대하게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부르짖어 기도만하지 말고 우리는 명령할 담대하게 시인하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이 산 보고 바다로 던지라고 말하고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대로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시인을 하고 이루어지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는 것에 말씀으로 언제나 결과를 지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무덤에 들어가 죽은지 나흘 만에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상여에 실려나가는 청년에게 관뚜껑을 열고서 말하니 그 말이 나가서 이 청년이 살아 일어난 것입니다. 네가 이 말을 했으니 네 딸이 고침을 받았느니라. 나았습니다.

바디매오에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주님이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환경에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바람아 잠잠 하라. 파도야 잠잠 하라. 그러면 그 말이 나가자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것 최성규 목사 아닌가? 최성규 목사가 어떻게 여기 와 있노? 아주 내 훌륭한 제자입니다. 아주 굉장한 사람이에요. 인천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내가 조그마한 창고 같은 집을 빌려서 그를 데리고 갔는데 마음에 괴로워요. 가보니까 물이 지하실에 꽉 들어차 있어요. 여기서 시작해라. 그런데 거기에서 두말하지 않고 변명하지 아니하고 예! 하고 시작해서 오늘날에 경인지역에 제일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저런 제자를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론>

다윗은 아직 성숙한 군인이 되지 않은 17살쯤 되는 초립동이지만 하나님이 같이 한 4차원적 삶을 가진 승리자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젊은 목동이었지만 그의 생각 속에 꿈속에 믿음 속에 고백 속에 하나님이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고깃덩어리 사람인 골리앗을 말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골리앗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많이 다가올 때 말싸움에서 이겨야 돼요. 여러분 말싸움에서 지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싸움에서 벌써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약속으로 나는 이겼다. 승리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말싸움에서 이기고 나가면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싸움에서 진 환경은 변화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체험을 많이 해야 돼요. 자기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 생활을 하면서 평소에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사자와 곰을 이긴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싸워야 할 적이 짐승에서 인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며, 다윗의 눈에 골리앗은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체험적인 신앙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번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경험해 보면, 그 다음 싸움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는데, 그의 성경에는 “T.P.”라는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T"는 뭐냐면 “Tried.” “P”는 “Proved” Tried는 시험해 보았다. “Proved.”는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내가 시험해 보고 성경말씀대로 이루어져서 증명되었다. “T.P.” “T.P.” “T.P.” 자기가 시험해 보고 증명이 되었으므로 이것은 담대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시험해 보고 증명되면 그만큼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믿고 시험에 승리하면 그만큼 여러분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응답을 체험하면 할수록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커질수록 더욱 담대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현재 것을 보고 말하지 않습니다. 절대 여러분 현재의 어려운 고난과 괴로움을 보고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이라고 인정하지 마십시오.

현재 나는 패배하고 있다. 슬프다. 괴롭다. 불행하다. 안 된다. 나는 이런 생활을 살아서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가.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소리하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바라보는 것을 현재처럼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나는 소망차다. 나는 이긴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불신앙은 현재 있는 것을 운명으로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이 여러분 속에 계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씀 속에 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 여러분이 들어가서 가슴에 품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년 동안 기도해도 마음에 꿈이 없이 기도하니까 응답 못 받았잖습니까? 그러나 밤중에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고 난 다음 자기 자식을 꿈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니까 믿음이 생겨나고 하나님이 이삭을 아들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꿈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믿음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담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고 발전합니다.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아멘.

/2015. 4. 26. 주일설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