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4월 26일
본문: 디모데후서 2:14~26
설교: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디모데에게 주의 종으로서 무엇을 힘써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사실상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듣고 따라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본문 14절) 합니다.
“그들”이란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다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세세한 일들 가지고 논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쓸데없고 교인들을 혼란스럽게만 하여 교회에 해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그들은 쓸 데 없는 논쟁으로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관해 사도 바울은 이미 딤전6:3-5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한 것은 디모데가 사도 바울로부터 받은 명령을 실행해야 할 책무의 막중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조금도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듣는 이들의 순진한 믿음을 망치게 하는 말다툼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이상한 이야기들을 갖고 들어와 혼란을 일으키며 별 것 아닌 일을 들추거나 남의 말꼬리를 잡아 말다툼을 일삼고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밥 먹듯이 하며 그것을 즐기는 자들이 꼭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온 교우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무익하고 해로운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무익하고 해로운 말다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이 교회에서 무익하고 해로운 말다툼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한다”는 것은 복음을 바르게 잘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디모데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착한 일꾼으로 인정받으려면 복음을 바르게 잘 설명하며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인들이 복음을 바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면 쓸데없는 말다툼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줄 모르고 성경공부에 관심 없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항상 무익하고 해로운 말다툼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계속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거나 맞장구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악성 종양이 교회 전체에 퍼지도록 내버려두는 일임을 교우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후메내오”는 사도 바울이 딤전1:20에서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쓴 적이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악성 종양과 같은 그릇된 말을 퍼뜨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도”는 여기 외에는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는 이름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언급한 사도 바울은 그들이 퍼뜨린 악성 종양과 같이 망령되고 헛된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힙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이 우리 각 사람에게서 이미 일어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오직 그렇게 영적으로 다시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지 육체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하며 그런 주장이 그릇된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전 15:12-19에서 분명하게 밝힌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은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부활신앙이 흔들리면 기독교신앙 자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구원에 대한 확신도 사라집니다. 교인들에게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면 교회가 와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은 친교단체는 될 수 있어도 교회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들이 아무리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고 그래서 에베소 교회 일부 교인들의 구원의 확신과 믿음이 흔들린다 할지라도 에베소 교회는 견고한 터 위에 서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터는 하나님께서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택하셨고 구원하실 당신의 백성이 누구인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로의 선택은 이랬다저랬다 흔들릴 것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그릇된 주장들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들을 아십니다. 교인들은 그 믿음을 가지고 의로운 삶을 살기만 힘쓰면 되는 것입니다. 참 구원받은 백성은 그 증거가 의로운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으로 쓴 것이 본문 19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라는 말은 “인치는 말씀 즉 보증이 되는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 즉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은 백성은 견고하다는 보증으로 주신 말씀이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는 말씀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말씀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니 염려하지 말고 오직 불의에서 떠나기만을 힘써라.” 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부활의 믿음을 지키며 의의 삶을 힘쓰기만 하면 구원받은 백성임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는 말로 하나님께 속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불의에서 떠난 삶으로 그 증거를 보여야 할 것을 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귀하게 쓰임 받는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 글을 통해 사도 바울이 의도한 것은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멀리하여 깨끗한 믿음을 지키라는 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한 데서 “이런 것”이란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오염되어 가지고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2-26절에서 사도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어떻게 목회해야 할지에 관한 권면을 반복합니다. 먼저 22절에서는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합니다. 여기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는 것은 육체적인 욕정을 다스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젊은이의 미성숙함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젊은이의 미성숙함에 빠지지 않기 위한 길로 사도 바울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은 어떤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65533;?#65533;?목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명목상의 교인이 아닌 참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를 때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며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 교회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청년의 정욕 즉 젊은이의 미성숙함을 피하라.” 할 때 젊은이의 미성숙함으로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일에 관하여 전체를 모든 관점에서 균형 있게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단지 조금 들어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아는 듯이, 혼자 아는 듯이 변론을 즐기는 것입니다.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보지 않고 신중하지 못하게 어느 한편에 서서 다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잘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말로 남을 잘 이해시킬 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과 행위를 분리할 줄 모르고 악한 행위는 정죄하되 악을 행한 자에게는 그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변화되며 용서받을 기회를 줄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젊은이의 미숙한 성향을 버리라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온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면은 곧 오늘날 우리 모두를 위한 권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본문 23-26절을 다시 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목회의 권면들은 그대로 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신앙생활의 교훈들입니다. 우리는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하지 않은 세세한 일들 가지고 쓸 데 없는 논쟁으로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의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며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온갖 세상의 소리들을 멀리 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고 귀하고 선한 일에 쓰임받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대하여 온유하며 인내하며 모두 영적으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온전히 사로잡힌 백성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