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깨우며, 은은하고 다정하게 들리는 종소리는 거의 날마다 울렸습니다. 교회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열어줍니다.

시골 교회에서 종을 치는 분은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새벽에 종을 치는 직분을 서로 하려던 모습도 간혹 떠오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교회와 성당에서 맨 먼저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종’을 흔들어 때립니다. 종은 무거움을 감내하며 좌우로 흔들리며, 그 흔들림으로, 복음이 부딪혀 멀리, 더 멀리 소망에 가득 찬 아름다운 희생의 노래가 많은 영혼들을 불러 깨웁니다.

그 종소리의 아픔과 희생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하게 했던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종소리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동네마다 이장님이 치는 종이 있었습니다. 모임을 열거나 초가삼간에 불이 나거나 재앙이 닥쳤을 때 다급한 종소리가 울렸지요. 이른 아침 두부 장수의 요란스러운 ‘딸랑딸랑’ 종소리는, 게으름 피우던 아이들도 일어나게 할 지경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는 밤 10-11시면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으며, 새벽 4시가 되면 이를 해제하기 위한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미리 옷을 입어 놓고 생업을 위해 나갈 준비를 하던 어르신들은, 사이렌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대문을 박차고 나가셨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종소리가 울릴 때, 사람들마다 소리의 전달이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종소리의 울림이 각자의 심령 깊숙이 파고드는, 깊은 깨우침이 되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산업화와 정보화를 거쳐 이제는 디지털 시대로 변모하면서, 어느 때부턴가 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생활의 편리가 마음의 편리까지는 충족해 주지 못하고 있음에도, 날이 갈수록 쾌락주의와 향락주의, 한탕주의와 물질만능주의만 판을 칩니다. 현대인의 병인 스트레스, 노이로제, 그리고 심한 강박관념과 피해망상, 고독으로 인한 우울증 등, 이 모두가 새벽 종소리를 듣지 못해 마음들이 피로해진 탓은 아닐까요?

현대인들의 마음이 부패됨으로 교회당 종소리가 마치 소음으로 들리고, 그마저 울리지 못하게 민원을 제공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성탄절이면 들려오는 징글벨 소리조차, 요즘엔 길거리에서 들리지 않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 의미와 분위기는 퇴색되고 있지만, 그래도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들렸던 종소리의 묘한 포근함이 더욱 그립고, 아쉽습니다.

예배 시간 30분 전에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의 의미는 각자에게 다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천당과 지옥으로 들릴 수 있고, 어떤 분에게는 ‘회개하라’는 음성으로, 또 어떤 분에게는 ‘용서하라’는 음성으로, 다른 분에게는 ‘사랑하라, 용기를 내라’, 또는 기쁜 찬송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종’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자기 몸을 때려 성도를 모으고, 불신자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그 아름다운 종소리는 어쩌면 희생의 열매로 인한 값진 보화가 아닐까요!

종소리는 혹 이생의 삶을 접기 위해 자살하려는 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날 교회를 다녔지만 갖가지 핑계로 나오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종소리는 주님께서 보내신 사랑의 천사가 아닐까요?

그런 종소리가 ‘소음’으로 들리는 것은, 시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이 부패되고 상한 탓은 아닐까요?

어린 시절 순박하고 청순했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그 시절 종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종소리를 들으며, 동네 꼬마들을 모아 여름성경학교에 가던 시절이 새삼 눈앞에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때 그 시절 종소리가, 지금도 심령을 가난하게 울립니다.

/이효준 장로 (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