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직신학회(회장 허호익) 제10회 전국대회가 24~25일 충북 영동 단해교회에서 ‘사회혁신과 교회개혁을 위한 조직신학의 모색’을 주제로 개최되고 있다. 이번 대회는 박영신(연세대 사회학 명예교수)·미하엘 벨커(하이델베르크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박사의 주제강연과 각 분과별 논문발표 등으로 구성돼 있다.

“기독교, 가·친족 중심 의식세계 무너뜨려”

▲박영신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첫 강사로 나서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를 제목으로 발표한 박영신 박사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가·친족 고착성을 뚫고 나갈 뿐 아니라 도시 구속성을 허물어뜨리고는 모든 구획과 지역을 넘어 그 모든 것 위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였다”며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가·친족 중심의 의식 세계나 도시 지역 중심의 의식 세계 할 것 없이 모두 무너뜨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는 어떤 의례상의 구별과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는 믿음, 그것이 유일한 기준이었다”며 “어떤 칸막이도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였으며,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여겼던 것이다. 종교 의례상으로 모두가 평등했다. 이 의례를 지켜온 교회 공동체에서는 가·친족 중심의 의식 세계나 지역·국가 중심의 의식 세계가 발붙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더욱 넓은 의식 세계가 요구되었다”고 했다.

박 박사는 또 “중국의 종교는 제사 제도라는 종교 의례를 통해 촌락의 고향 집안에 거점을 둔 가문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혈연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결속 의식을 유지하고 강화시켰다”면서 “아무리 도시 거주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제사를 지내야 할 곳은 도시가 아니라 촌락에 터를 잡고 있는 집안이었다. 도시의 삶은 가·친족의 끈으로 묶여 있는 ‘사사로운’ 혈연의 자연 관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에 반해, 서양의 기독교는 가·친족의 결속 관계를 비롯해 인종과 국적에 터한 국가의 결속 관계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정당성의 바탕을 제공해, 현존하는 모든 ‘특수한’ 관계를 송두리째 약화시키고 이를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결속 관계를 만들어, 이에 참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강한 동기와 능력을 마련해주었다”고 했다.

박 박사는 “기독교의 힘을 받아, 오랜 조상 숭배의 의례는 형식의 차원에서 보면 크게 축소되고 약화됐다고 할 수 있다”며 “그러나 조선 시대로부터 자리잡게 된 유교의 제사가 내세운, 가·친족 본위의 삶의 의식 세계는 아무 탈 없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가·친족 의식이 우리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으며, 또 그만큼 기독교의 초월 감수성이 기독교인의 의식 속에 얕게 드리워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기독교 정신은 초월 감수성을 가지고 현실에 맞서 부단히 저항하는 삶의 지향성을 낳을 수밖에 없다. 만일 이러한 삶을 키우지 않고 현실 체제에 맞춰가는 사람을 기른다면, 그것은 먹고 사는 현실의 필요에 무릎 꿇고 살아가는 현대판 ‘노예’를 만들어낼 뿐이고, 마르크스의 입을 빌려 말하면 ‘대중의 아편’으로 떨어질 뿐”이라며 “기독교는 칼의 힘과 돈의 힘을 가진 자들이 좋아할 ‘현실 체제의 추종자’를 양산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지 않다”고 역설했다.

“신학, 주관적 확실성과 객관적인 내용, 수미일관성 요구”

▲미하엘 벨커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두 번째 주제강연자로 나선 미하엘 벨커 박사는 ‘무엇이 신학을 신학으로 만드는가’(What makes theology theology)를 발표했다. 벨커 박사는 “신학에 관한 가장 간략한 정의는, ‘신학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라며 “이러한 기본적인 정의는, 그것이 간단한 만큼, 보다 학문적인 답변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각개 및 모든 생각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면, 신학적인 것으로 인정되기 위한 ‘언설’(言說)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최소한 요구 되는가. 만일 하나님 혹은 종교적 문제에 관한 언급이 ‘신학적 언급’으로 인정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며 “첫째는, 포괄적이면서 지속적으로, 구원하는 고상한 힘과 관계되는 확신이라는 최소한의 지평과, 적어도 지금까지 실존적으로 입증된 최소한의 수준”이라고 했다.

이어 “신학적으로 숙고된 언설이 되기 위해 두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언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야 하고,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따라서 조용한 기도나, 혹은 하나님에게 적시(摘示)된 기적은 신학적 언설로 간주될 수 없다. 신학적 명제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종교적 언설들은 상호 교통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종교적 확실성을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적 언설은 대화를 위해서, 그리고 그 내용에 주목하도록 발전시키기 위해서 개방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벨커 박사는 “확신컨대, 신학적 언설은, 그 어떤 건전하고 성숙한 신앙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신학적 언설들은 고백 혹은 선언의 수준에 도달하고자 해서도 안 된다”며 “신학적 언설들은 부분적이고, 초보적이며, 그리고 심지어는 함량미달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신학적 언설들은 적어도 그 어떤 최소한의 일관된 확실성, 그리고 그 어떤 최소한의 일관된 주제를 결합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학이란 단지 개인적인 확실성과 교감(consensus)을 위한 일반적인 확실성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며 “뿐만 아니라, 신학은 단지 주제와 관계된 수미일관성(통일성, coherence)과 정확성만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신학은 두 가지 차원을 서로 연결해야 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주관적 확실성과 객관적 내용이 수미일관해야 하고, 따라서 신학은 진리 추구를 위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벨커 박사는 “진리가 가끔은 단지 확실성과 혼돈되고 있으며, 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며 “그래서 신학은 가끔 지속성과 정확성으로 환원되며, 특별히 학문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신학은 두 가지 차원, 곧 주관적 확실성과 객관적인 내용, 그리고 수미일관성을 요구한다. 양 측면의 상호 도전은, 신학이 진리를 추구하도록 만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