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세상에 나처럼 기구한 팔자는 없을 거야?” “내 팔자는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몰라!” “다 자기 팔자대로 살아가는 거지 뭐!” “팔자는 타고 나는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어.”

정말 그런가? 타고난 운명이 내 인생을 결정하도록 나둬야 하는가?

20명을 끔찍하게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그는 왜 그렇게 처참한 살인행각을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팔자 탓이다.

그의 생일은 4월 18일이다. 4자를 죽을 사(死) 자와 연결시켰다. 18을 욕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자신의 휴대폰 뒷자리를 1818로 했다. 인터넷 아이디나 비밀번호도 모두 1818로 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망하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1818인생. 그것이 유영철의 운명을 결정하고 만 게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운명에 굴복한 것이다.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리며 인생을 스스로 망가지게 만들었다.

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팔자 탓으로 돌리는 이들이 있다. 팔자의 늪에 자신을 방치한 채 불행을 친구 삼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팔자는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팔자의 틀 안에 내팽개쳐 두지만 않으면 결코 팔자라는 괴물이 내 인생을 망칠 수 없다. 무책임한 사람이 팔자 탓을 할 뿐이다. 믿음이 없으니 팔자의 희생물이 될 뿐이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팔자를 고치며 산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생을 섭리해 나가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도 주셨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1818인생을 살 수도 있지만, 새로운 운명을 써내려 갈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좋은 만남을 이루어도 인생이 달라진다.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으며 자란 한 소녀가 있다. 얼굴도 변변치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무시당했다. 공부도 잘하고, 똑소리가 나는 언니가 동생을 윽박질렀다. ‘나한테 언니라고 부르지 마!’ 그런데 자라서 남편을 잘 만났다. 지금은 언니보다 훨씬 더 멋진 인생이 되었다. 남편을 잘 만나니 팔자를 고쳤다. 사람을 잘 만나도 얼마든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만삭이었을 때, 어머니는 감을 따서 팔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다. 좋은 감을 골라 따려고 하던 어머니는 한순간 땅으로 떨어졌다. 썩은 가지를 밟았기 때문에. 어머니 뱃속에 있던 아이는 놀지 않았다. ‘충격을 받아서 죽었나 보다.’ 아이가 놀지 않은 채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보잘것없었다.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이 우리 부모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절에 입적시키지 않으면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부모님은 절에 입적시키지 않았다. 이미 다섯 자녀가 있어서였을까? 별 볼 일 없는 아이여서일까? 그렇게 자란 아이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가는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한 해 늦은 아홉 살이 되어서야 입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라난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내 인생은 변했다. 하나님은 별 볼 일 없던 나를 목사로 만드셨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팔자니까’라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팔자를 고쳤다. ‘나는 이런 팔자로 태어났다’고 자신의 운명을 속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예수님에게는 어떤 팔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고 동네로 들어오셨다. 한센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팔자를 고쳤다(1-4절). 백부장의 하인인 중풍병자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고침을 받았다(5-13). 베드로의 장모도 열병에서 나음을 받았다(14-17). 가다라 지방에서는 귀신들려 광인으로 살던 두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28-34).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새로운 운명을 시작할 수 있다.

마태복음 9장으로 들어서면, 가버나움 동네에 한 중풍병자가 나온다. 구질구질한 인생이다. 팔자가 사납다고나 할까? 자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 팔자를 고쳤다. 병든 육신을 고쳤다. 중풍병에서 자유롭게 되니 마음의 병도 고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적인 질병인 죄를 사하는 은총도 주셨다. 정말 팔자 고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팔자를 고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게 있다.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간 네 사람이다(막 2:3).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어렵게 되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침상을 예수님께로 내려놓는 극성을 부렸다. 그런데 그 극성스러운 믿음이 결국 한 사람의 팔자를 고쳐 놓았다.

다른 사람의 팔자를 고쳐 줄 생각이 없는가? 이 세상에서의 팔자 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소유하게 하는 대단한 팔자를!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징검다리와도 같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팔자 타령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팔자를 고쳐 쓰면 된다. 다른 사람의 팔자를 고쳐주는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갈 수 있다.

‘주님의 은혜’가 ‘타고난 팔자’보다 훨씬 더 강함을 믿어야 한다. ‘환경’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하신다. ‘태어난 운명’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함을 신뢰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