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교회 설동욱 담임목사. ⓒ예정교회 제공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015년 사순절은 나에게 가장 추운 기간이었다.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소나기를 맞아야 했다. 나의 가장 아픈 상처인 학력에 대한 문제로 협박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내 삶에 옹이로 박혀 있는 상처, 수많은 고난을 통해 단단해져 버린 상처 덩어리를,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드러내야만 했기에 가슴이 시렸다. 정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너무 아픈 과거이기에 그냥 묻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니, 이 또한 순종하는 마음으로 내 삶의 옹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아버지의 소천

아버지는 내 나이 세 살 때 칠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에 어머니 혼자서 칠남매를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아들 셋을 고아원에 맡겼다. 고아원에서 보모로 일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기에, 우리 형제 중에서 셋은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고아원 생활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형님들은 몇 번이고 고아원에서 도망쳤고, 어머니는 죽으려고 수면제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삶이 고통스러웠다. 어린 나는 도망도 가지 못하고 엄마만 기다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고아원으로 오셨다. 나는 뛸 듯이 기뻤고 그 때부터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조그마한 교회였다. 어머니는 교회 사찰로 취직이 된 것이었다. 월급은 내 기억으로 5천 원 정도였던 것 같다. 우리는 교회 단칸방에서 살면서 교회 청소도 하고, 관리도 하고, 종 치는 일도 했는데, 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종을 치곤 했다.

초등학교 상급생이 되면서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동욱아, 동욱아! 넌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학교를 못 가면 어떡하니? 내가 입학금을 내 주면 학교를 다닐래?” 그래서 들어간 학교가 당시 중학교 3년 과정의 대성고등공민학교였다. 등록금도 싸고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그런 학교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오후에는 이 다방 저 다방에 다니면서 신문을 팔기도 했고 구두를 닦기도 했다. 때로는 우유 배달 등 돈이 되는 일은 무조건 해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책을 살 돈이 없었기에 성경책을 죽도록 읽었다.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못 되어 당시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성경고등학교인 수도성경전문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했다. 다른 일반고등학교와는 달리 일반과정도 배우지만 성경 66권을 배우는 특수학교였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배웠다.

하나님의 소명

부흥회만 하면 나는 맨 앞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했다. 내 삶이 너무 힘들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통성기도를 하는데 강한 성령이 나에게 임했다. 순간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한없이 울었다.

“하나님, 어쩌다가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못나고 무지한 사람을! 저는 못합니다, 저는 못합니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뜨겁게 생각나게 하신 말씀이 고린도전서 1장 26-31절이었다.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날 이후 그 말씀은 늘 내 마음을 새롭고 강하고 담대하게 했고, 세상은 나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의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내 삶의 터닝포인트였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나의 유일한 백이 되어 주셨다. 환경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예수님이 가장 든든한 가드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칼빈신학교를 2년간 다니다가 돈이 없어 휴학을 했다. 그러다가 1987년에서야 총회신학교 목회연구과(현 총회신학연구원)를 졸업했다. 당시의 은사님은 박영환, 이찬영, 박병진 목사님이셨다.

강도사고시를 거쳐 목사안수를 받아 1988년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 후 합동측에 가입하여 총신대학교 안에서 총회목회대학원 3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편목과정을 공부하고 강도사고시를 거쳐 합동측 정회원 목사가 됐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지도자 과정에서 상담학을 공부하고, 총신대학교와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 공동학위과정을 이수하고, 논문 ‘목회 사역의 동반자로서 사모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사모에 대한 논문으로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학위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곳에서 공부를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북한선교원에서 하는 목회대학원에서 2년을 공부했고, 민족복음화부흥사연수원에서도 공부를 했다. 당시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달려가서 은혜를 받았다. 어릴 적 배우지 못함에 대한 열등감을 씻어내는 길은 무엇이든지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너 이제 공부하는 것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나는 배우지 못함에 대한 한이 맺혀 있었기에 그 열등감을 씻기 위해서 끝없이 배우러 다닌 것이다.

한때는 이런 적도 있었다. 어떤 목사님께 “모 대학의 강의실을 빌려서 목회자들을 모아 계절학기로 공부하면, 미국의 어떤 신학대학과 연계하여 학위를 준다”는 권유를 받고 공부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 둔 적이 있다. 그때는 편목과정을 하기 전이라 그 목사님이 원하는 이력을 써준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올무가 되어 협박의 도구로 사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의 개척시대

▲설동욱 목사의 과거 목회 모습. ⓒ예정교회 제공

“고기가 먹고 싶어요, 아빠.”

아내와 함께 안방예배를 8개월 드리면서 사역을 준비했다. 아내를 놓고 열심히 설교를 했다. 아내가 아멘을 하지 않으면 ‘왜 아멘을 안 하느냐’며 아멘을 할 때까지 반복해서 설교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지금도 내 설교에 가장 큰 은혜를 받는다.

1988년 10월 22일 면목동의 15평 작은 공간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먹을 것이 없어서 농수산물 시장에서 야채를 주워서 먹었다. 어느 날 밥상에서 아이가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왜 안 먹느냐고 하니까 “고기가 먹고 싶어요, 아빠” 하면서 엉엉 울었다. 우는 아이를 안고 ‘이것이 무 고기, 이것이 배추 고기’하면서 우는 아이를 달랬다.

한 명씩 전도되어 오는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우리 교회 초창기 멤버들이다. 나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청년들을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보내셨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삶을 간증하면서 열심히 설교를 했다. 그들이 교회에서 큰 위로를 받고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하나님이 이들을 위해 나를 부르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도 나오면 우리와 같은 형편에 처한 사람들 뿐이었다. 교회에 헌금을 하기 위해서 파출부를 다녀야 했고, 교회 헌금을 하기 위해서 붕어빵을 구워서 팔아야 했다. 어떤 성도는 교회 연보를 위해서 간이식당을 차려서 힘껏 헌금을 하기도 했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시작된 교회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작한 교회이기에 기도밖에 없었다. 성도들은 매일 교회서 철야하면서 자다시피 했고, 교회가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올 정도였다. 우리 청년들은 날마다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시작된 교회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지금은 상봉동에 1,000여 평의 건물에서 목회를 할 수 있게 하셨다. 나에겐 기적 같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설동욱 목사가 CTS ‘유재건의 나의 어머니’에 출연해 간증하던 모습. ⓒ예정교회 제공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울고 계셨다. 난 막내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왜 우세요, 어머니?” “미안해서… 너에게 해준 게 없어서…” “엄마가 평생 기도해 줘서 목사 됐잖아요.” “그건 그거고… 너에게 해준 게 없어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평생 부모에게서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한 나도 상처지만, 줄 것이 없는 부모의 마음은 더 큰 상처라는 것을 알았다. 평생을 교회 사찰로 사신 어머니! 그래서 시작한 것이 목회자 가정사역이다.

목회자 가정을 위한 사역

▲전국 목회자 자녀 세미나. ⓒ예정교회 제공

“마음껏 울고, 마음껏 웃고, 마음껏 행복해 하라”

목회를 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목회자의 가정이 행복해야 목회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내가 살면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목회자 자녀들이었다. 똑같은 교회에서 나는 목회자의 자녀가 아닌 사찰의 자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목회자 자녀와 사찰 자녀는 나에게 늘 아픔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목회자의 자녀는 늘 피해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가장 먼저 목회자의 가정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회자 자녀 세미나를 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 목사의 자녀들이 부러웠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 많은 목회자 자녀들이 은혜를 받고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목회자 사모 세미나에서 강연하는 설동욱 목사. ⓒ예정교회 제공

목회자의 가정이 행복하려면 사모님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보석인 내 아내는 교회에서 힘든 일은 도맡아 한다.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가장 믿어 주고 응원해 주는, 그런 아내가 있었기에 나는 세계를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음껏 목회할 수 있었다.

▲목회자 사모 세미나에서 기도하는 사모들. ⓒ예정교회 제공

그런 사모님들과 작은 행복을 나누고 싶었고, 목회자 가정의 회복을 위해 함께하고 싶었다. 그것이 목회자 사모 세미나와 목회자 자녀 세미나를 하게 된 동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목회자사모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사모님들이 치유상담을 배울 수 있는 치유상담교육연구원을 개원하여 사모들의 공간을 만들게 된 것이다.

네가 소나기를 피하려고 하느냐!

▲기도하는 설동욱 목사. ⓒ예정교회 제공

협박에 시달리며 사순절 내내 심령에 비를 맞으며 기도했다. 사순절 새벽기도 때 성령님을 통해 위로하셨다. “동욱아! 지금 발가벗은 채로 비를 맞는다 했느냐? 나는 발가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달렸느니라. 비를 피하려고 하지 마라. 돌 던지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의 위로가 십자가에서 흘러내렸다.

설교를 하면서 가장 먼저 성도들에게 내 삶의 옹이를 드러냈다. 나도 울고 성도들도 울었다. 사순절 내내 성도들의 기도가 더 뜨거워졌고, 교회도 더 단단해졌다. 많은 목사님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설 목사, 난 당신이 그런 어려움을 겪고 살았는지 몰랐네. 당신은 인간 승리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일세, 정말 존경하네.”

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냥 감사한 마음이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내가 가장 부끄러워한 것을 인간 승리라고 말해 준 목사님이 한없이 고마웠다. 어떤 목사님은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다고, 이름도 모르는 목사님이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왜 나에게 소나기를 맞게 하셨는지 알게 되었고, 내 삶의 옹이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또 얼마 전 이런 메일도 받았다. “안녕하세요, 설동욱 목사님. 저는 정재광 목사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만 저는 목사님을 항상 기억하고 기도해 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저는 제2회 목회자 자녀 세미나에 참가했었습니다. 칼빈대학교에서 했던 자녀 세미나였는데 2회가 맞나 모르겠습니다. 저는 목회자 자녀로 주님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목회자 자녀 세미나에 참여하였다가 주님을 만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목사님의 뜨거운 기도로 안수받으며 성령체험을 하고 저는 목사가 되기로 선언했습니다. 그 후 열심히 준비하여 미국에서 M.div와 Th.m(청소년교육)을 전공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올 1월부터 귀국해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에게 이메일을 드린 이유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응원하고 싶어서입니다. 목사님의 귀한 사역 가운데 저 같은 저보다 더 큰 열매들이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고, 항상 기도로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예전 자녀 세미나 이후 목사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목사님 많이 힘들고 지치실 때가 있으시겠지만 힘내십시오. 예전에는 성도와 목회자들이 잘 모르고 무지했기에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요즘은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꼭 치유가 되어야 하는 대상들입니다. 목사님 포기하시지 마십시오! 목사님 항상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정재광 목사 올림”

나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변화되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소명에 합당한 삶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하나님이 알기에 더 단단해지라고 소나기를 내리신 것이다. 높은 산 바위를 뚫고 일어선 한 송이의 푸른 소나무처럼 생명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기도에 매진하게 하신 하나님이 늘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