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할례(割禮·circumcision)라는 뜻의 ‘페리토메’는 ‘주위에’라는 뜻의 ‘페리치사’와 ‘자르다’라는 동사 ‘템노’를 합친 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물로트’를 번역한, ‘자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물’에서 온 말입니다.

즉 할례의 통속적 의미는 남자의 포피를 자른다는 것이며, 종교 의식으로 이스라엘을 비롯해 에돔과 모압, 셈족 일부와 이집트,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에서 행했다고 합니다. 반면 가나안 부족들과 블레셋, 바벨론, 앗시리아 등에서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지금도 신과의 계약 표시로 생후 8일째 남자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99세에, 서자인 이스마엘은 13세에, 이삭은 생후 8일째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진정한 마음의 할례’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문은 ‘마음의 껍질을 벗기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께 대한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오직 그를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즉 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전쟁 전 백성들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적의 기습을 당할 수 있어 상당한 위험이 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기에게만 의지하길 원하셨기에,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하면서 구속의 역사를 기리는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때 완전무장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적진 앞에서 할례를 행하며 고통을 받게 하는 일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확인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할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날처럼 마취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칼도 아닌 부싯돌로 생살을 베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야곱의 딸 ‘디나’의 강간 사건 때 일입니다. 히위 족속인 하몰의 아들은 디나를 사랑하여, 아버지에게 디나를 자기 아내로 얻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래서 ‘디나 오빠’들의 요구사항인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할례 후 그들이 고통스러워할 때, 시므온과 레위는 칼로 잔혹하게 그들을 살해하여 불행을 겪게 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할례 의식이 아니라 오직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게 되었으니, 어떤 의미에서 큰 다행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의 세례에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까? 그저 연중행사처럼 세례식이 거행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특히 세례 의식이 끝나도 삶의 변화를 발견할 수 없으니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세례라는 의식이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의 언약은 유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정반대의 삶을 영위한다면, 그 예식은 무효가 되고 만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세례는 그저 의식에 불과하지만 진정한 감동이 동반되는 마음의 회개는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할례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육신으로 하는 표면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하는 이면적 할례가 참 할례라고 했습니다(롬 2:28-29).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새 신자들이 주님을 확실하게 영접하고 변화되는 삶을 보일 때만 세례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어느 정도 기간만 지나면 무조건 세례를 베풀곤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도 모른 채, 교회가 무엇이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세례를 받으면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1천만 기독교인이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성도가 얼마나 있느냐가 관건 아닐까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받은 10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당한 사건은, 우리들에게 좋은 본보기이자 가르침입니다.

종교의식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 착각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분을 마주하고 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더 이상 주님을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와 한계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속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 하면서도 무기력한 것입니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메말라 갑니다. 자신 안으로만 숨어드는 시선은 우리를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내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아파하시는 사람과 현장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참 성도들에게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맞이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삶 없이 그저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바라보는 방황에서 돌아서서, 그분만을 향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 (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