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그 악마 때문에 언니가 죽었어요.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 악마는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는 게 너무 분해요.”

얼마 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어느 날 오후 5시. 20대 여성이 서울 한남대교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코끝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운 강바람을 타고 허공에 뿌려졌다. 꽃다운 나이에 도대체 왜?

난간에 매달린 그녀의 뇌리에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탈을 쓴 악마 때문에. 그 악마가 저지른 만행 때문에 한 살 터울의 언니는 작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악마 때문에 본인도 지금 죽음의 문턱에 매달려 있다.

난간에 매달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녀의 머리에 지울 수 없는 두 얼굴이 있었다. 언니를 죽인 아버지. 아버지의 추악한 행동 때문에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언니. 언니와 자신은 이렇게 망가졌는데 멀쩡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악마의 탈을 쓴 아버지. 그게 너무너무 분했다.

이제 난간을 잡고 있는 손만 놓으면 그는 차디찬 강물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녀가 난간을 잡은 손을 막 놓으려던 찰나, ‘딸이 자살하려는 것 같다’는 엄마의 신고를 받고 한남파출소 경찰관 두 명이 달려왔다.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14년간 악마의 탈을 쓴 아버지의 행각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1994년 당시 다섯 살이던 큰딸을 성추행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거나 집을 비울 때면 병원놀이라고 속여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했다. “이 놀이는 아빠와 하는 병원놀이야.”

어린 나이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지라 친할머니에게 말했다. “아빠가 자꾸 나를 만진다.” 그러나 돌아온 건 폭언이었다. 할머니는 오히려 손녀를 나무랐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은 큰딸은 아버지에게 “추행하지 말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딸을 윽박질렀다. “말을 듣지 않으면 고아원에 보낸다!”고. 어쩔 수 없이 딸은 2007년까지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악마의 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둘째 딸을 향했다. 아버지는 둘째 딸이 열한 살이던 2001년부터 3년 동안 성추행을 일삼았다. 큰딸을 성폭행하며 “자꾸 반항하면 동생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2006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하게 되었다. 두 딸은 엄마를 따라 나왔기 때문에 “이제는 지옥 같은 생활도 끝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 조화한가? 아버지의 검은 손길은 계속 뻗쳐왔다. 아버지는 수시로 큰딸에게 찾아와 “자꾸 반항하면 동생도 가만두지 않겠다”며 지속적인 성폭행을 저질렀다.

큰딸이 성년이 되던 2010년, 아버지의 범행을 눈감아주던 친할머니가 죽었다. 그제야 큰딸은 어머니에게 그 동안 있었던 끔찍한 일들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그 동안 심증은 있었지만 차마 딸에게 선뜻 물어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어머니는 딸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너무 미안하다. 내가 우리 딸들한테 먼저 물어보고 말할 수 있게 해 줬어야 했는데….”  그 후 어머니는 큰딸에게 4년 동안 정신과 치료와 상담을 병행해 받게 했다. 악몽과 같았던 ‘과거’를 깨끗이 지우게 하고 싶어서. 그러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좀처럼 극복하게 할 수가 없었다.

큰딸이 숨지기 1년 전이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자신의 사연을 적어 보냈다. 사연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절대 자책하지 마세요.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처음 상담 선생님께 제 잘못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저 또한 그 사실이 의심스러웠습니다. 혹시 내 잘못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그래도 여러분은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4년 동안 애썼다. 하지만 큰딸은 결국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5월에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그 후에 작은딸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성폭행이 오래 전에 발생했고 언니마저 세상을 떠난 상태라, 자포자기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악마와 같은 아버지는 버젓이 활개치며 잘 살고 있었다. 너무 분했다. 너무 원망스러웠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딸마저 언니 뒤를 따르려 했던 것이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머니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우리 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세상에 알려 달라.’

세상에는 남들을 해하고 죽이는 악마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희생제물로 삼는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악마의 본성을 가진 자들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은 멍들고, 사회의 기강과 질서가 깨어진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한다. 그래서 고통이 몰려온다(딤후 3:1). 어두움의 영에게 짓밟힌 사람들의 생각은 허망해졌고, 마음이 어두워졌다(롬 1:21).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다(롬 1:24, 26). 알고 보면 이게 바로 저주이다. 내버림당한 마음.

그런데 악마의 본성을 가진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이들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 인간은 스스로의 죄와 허물 때문에 고통의 수렁에서 허덕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다. 허물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인류의 창조자이시다. 만왕의 왕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채찍을 맞으면서. 침 뱉음을 당하면서.

악마의 본성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움을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야 한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우리 생각의 그릇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야 한다. 이 세상 찌꺼기로 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세상을 주시하던 눈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악마의 본성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인륜도, 도덕도, 정도도 잃어버린 미친 마음을 거룩한 성령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내 안에도 악마의 본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악마의 손에 넘어졌으니까. 예수님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재정을 맡았던 제가 가룟 유다도 악마의 유혹에 휘말렸으니까.

‘나는 그럴 리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 연약한 자이다. 우리 모두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