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억울함도 억울함 나름이다. 첫째, 자기 잘못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 2:20a) 자신이 잘못한 행동 때문에 아픔과 고통을 당하면 그건 당연하다. 더구나 그게 악한 일이고, 죄일 경우는 ‘잘됐다’고 할 수 있다.

한 신사가 120km로 차를 몰다가 교통경찰관에게 걸렸다. 그 신사는 자기보다 더 속도를 내며 지나가는 다른 차들을 보고, 자기만 적발된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몹시 못마땅한 눈으로 경찰관에게 대들었다. “아니, 다른 차들도 다 속도위반인데 왜 나만 잡아요?” “당신 낚시 해봤소?” “낚시요? 물론이지요.” “그럼 댁은 낚시터에 있는 물고기를 몽땅 잡소?” 이런 경우는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억울함이다.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선을 행하고 당하는 억울함도 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0b) ‘좋은 일’을 하고도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어머니 댁, 즉 본가에 갔다.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창문 쪽으로 가서 보니 중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세 명이 아파트 놀이터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었다. 너무 시끄럽다 보니 경비 아저씨가 나와서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괜찮겠지’ 생각하고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한 아이가 경비 아저씨에게 대드는 것이었다.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족들에게 상황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잠깐 내려갔다 오겠다’고만 하고 내려갔다. 요즘 아이들이 무서운지라 그냥 가만 두면 경비 아저씨가 곤경에 처할 것 같아 그냥 내팽개쳐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아파트 5층에서 내려가 보니, 경비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아이들만 있었다. “너희들, 경비 아저씨한테 그러면 되겠니?” 조금 전 경비 아저씨에게 대들던 아이가 대뜸 대꾸하며 대들었다.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세요!” “너희들 어디 살아?” “성남 살아요.” “성남에 살면서 왜 남의 아파트까지 와서 떠들어?” 그 아이는 계속해서 대들면서 대꾸했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17살인 아이를 붙들면서 말했다. “여기는 시끄러우니까 아파트 입구 쪽으로 가서 얘기하자!” 그러자 아이는 손을 뿌리치면서 실갱이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저씨가 피고 있던 담배가 그 아이의 얼굴에 스쳤다. 그러자 아이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신고하려면 해라!”

잠시 후 경찰이 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파출소로 끌고 갔다. 그 아저씨는 가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따라갔다. 파출소에서 자초지종을 얘기했지만 경찰서로 넘겨져 또다시 조서를 받았다. 경찰 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며칠 후에 체포구속 통지서라는 우편물이 날아왔다.

우편물 내용을 보니 아저씨가 “멱살을 잡고 담뱃불로 지졌다”는 조서가 작성되어 있었다. 결국 아저씨는 피의자가 되어 현행범이 되고 말았다.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우리네 현실이다.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할 게 있다. 첫째,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연약함이 있을 수도 있다. 둘째, 그래도 억울할 때는 지혜롭게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셋째, 그래도 억울하면 법과 질서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따져봐야 한다. 넷째,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사단이 주는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한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을 향해 칼을 빼들었던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다. ‘당하라’고 말한다. 그래도 ‘참으라’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게 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다.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속상하고 억울한 생각에 미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런 감정에서 자유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따를 모범적인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 입에 거짓도 없다. 그런데 우리 죄를 담담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 대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다. 이게 우리가 따라가야 할 예수님의 모델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 내가 복수하려고 하지 말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39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어느 미국 남성의 이야기다. ‘리키 잭슨’이란 미국인이 있다. 그는 1975년 5월 클리블랜드에서 ‘구멍가게 주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2명의 친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12살인 ‘에디 버넌’이라는 소년이 “잭슨이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꼼짝없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사실 그 소년은 현장이 아닌 인근 스쿨버스에 탑승해 있었다. 친구와 경찰의 말을 듣고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당시 배심원들은 버넌의 증언을 토대로 잭슨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사법 당국이 형을 감형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한편 거짓 증언을 했던 버넌은 오랜 세월 동안 양심의 가책을 받아 힘들어했다. 그러다가 한 목사님을 만나 39년 동안 숨겨 두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급기야 클리블랜드 법원에서 진행된 잭슨 석방을 위한 재판에서, 버넌은 자신의 증언이 거짓이었음을 고백했다. 이로써 잭슨은 무죄로 풀려났다.

두 사람은 39년 만에 교회당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뜨겁게 부둥켜 안았다. 위증의 피해자로서 39년 동안 옥에서 살았던 잭슨.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그는 버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당신이 그렇게 고백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그러자 버넌은 흐느껴 울면서 사죄했다. 그런데 잭슨은 버넌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우리 모두 피해자이다.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 온 세상의 주인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어가셨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이 땅에서 악한 사람들의 계획에 의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속상한 일이고,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항하지도, 분노하지도, 복수하지도 않고 억울한 그 길을 걸어가셨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요청하고 있다. ‘너희도 그 길을 걸어오라’고.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처럼.

그런데 알고 있는가? 그 길이 있었기에 사죄의 길이 열렸고, 의의 길이 열렸으며, 나음의 길이 펼쳐졌다. 지금도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가? 그래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순종함으로 묵묵히 따라가야 한다. 그게 바로 승리의 길이니까!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