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쟁터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시편 92편 머리에는 ‘안식일의 찬송 시’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시편 92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안식일에 사용했던 예배 시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기록해 놓은 노래인 것입니다.

시편 92편 1절로 15절 봅시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야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야훼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야훼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야훼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야훼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하나님 앞에 다윗은 시간만 있으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 속에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가득 차 있고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받는 모습을 감사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야훼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야훼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우리는 새 안식을 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늘 감사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찬송시를 읽으면 깊은 하나님의 계시도 거기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승리도 그곳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은 굉장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을 하나님께로부터 묵시로 받아서 적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읽고 묵상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왜 찬양을 해야 되는 것인가. 다윗의 생애는 찬양으로 시작하고 찬양으로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복을 받을 때는 언제나 찬양을 많이 했습니다.

<본론>
1. 찬양은 믿음의 표현

왜 그러느냐면 찬양은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믿음이 충실한 사람은 언제 봐도 찬양을 부르고 찬양을 흥얼거립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은 아예 찬양 안 불러요. 교회 와서 예배 드릴 때도 제가 강단에서 내려다 보면 다른 사람 다 찬양하는데 자기 혼자 손 보고 시계 보고 노래하는 사람들 이렇게 쳐다보고 찬양을 안 합니다. 믿음은 찬양을 통하여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모압 자손, 암몬 자손, 세일산 주민 연합군의 침략을 당했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 당장 이방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점령하려고 하는데 여호사밧 그만한 군대가 없고 훈련도 되어 있지 않고 무장도 부실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누구보다 다른 것은 찬양이 바로 원수를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뿐 아니라 마귀를 대결해서 싸우는 무기가 되고 그 다음에 자기에 대해서 용기와 힘을 주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무장을 준 것이 입술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로 23절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야훼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야훼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야훼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 죽였더라”.

전쟁에 나가는데 성가대를 조직해서 군대에 앞서서 노래를 부르며 나가게 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노래를 부르는 자기들의 감추인 처소가 다 드러나고 공격 목표가 분명하게 보이게 만드는데 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를 받은 왕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하여 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원망하고 탄식하지 말고 잘 부르는 찬송을 하나님 앞에서 부르시면 그 찬송을 부르시는 곳에 하나님이 같이 와서 싸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홀로 살지 않습니다. 예배와 찬송을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이 와서 계신 것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가 가장 많으며 다윗이 가장 많이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다윗의 시는 150편 중에 75편이나 되는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보면 노래 잘하는 목사들이 참 많아요. 그런데 노래를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예배가 잘되는 것을 깨달은 목사들이 돼지 목다는 소리로 노래를 해서 예배를 망치는 것도 보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질겁을 하는 것, 노래는 잘 못하거든 혼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처럼 혼자... 여러분 앞에서는 할 수 없이 부르지만 저는 혼자 늘 노래를 부릅니다. 잘 못 부르는 노래 소리에 악보를 보지 못하는 제가 나가서 노래를 부르면 다 혼돈을 일으켜 노래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만성천자가 되고 내가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다윗은 언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좋을 때도 노래 부르고 어려울 때도 노래 부르고 평안할 때도 노래를 부르고 전쟁할 때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번 다윗이 법궤를 걸머지고 예루살렘으로 오는데 법궤 앞에서 얼마나 좋아서 뛰고 춤을 췄습니다. 만성천자 임금 다윗인데 체면도 안 차리고 그냥 막 춤을 추고 그러다가 허리띠가 끌러져서 바지가 다 내려간 것도 모르고 춤을 췄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내가 사울의 첫째 아내가 창문으로 이렇게 내려다 보니까 좌우간 임금이 체면도 없이 막 뛰고 구르고 해서 바지가 다 내려간 것도 모르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왕이 법궤를 성전에 모셔놓고 집에 들어오는데 방에 들어오자 마자 그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얼마나 영화로운지 바지를 벗고 춤을 추는데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다고...

그런데 다윗이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노했습니다. 네 눈에는 내 바지가랭이 내려가는 것 밖에 안보이더냐?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을 하기 위해서 바지가랭이가 다 내려가도 나는 괜찮다. 네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모욕했으므로 네게는 자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 흉보다가 한평생에 그 부인이 자손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하거든 박수를 쳐주지 이렇게 하지 마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와 찬양을 우리가 다 함께 합쳐서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요.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많이 썼는데, 거의 모두가 광야에서 쓴 것입니다. 그는 고독한 광야에서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도 고난 중에 쓴 찬송시가 많습니다.

미국의 윌리엄 커싱(Williamcutt Cushing, 1823∼1902) 목사님은 갑자기 목에 큰 이상이 생겨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강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른 목적에 자신을 사용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3백여 편의 찬송가를 썼는데, 그의 신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곡이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419장)라는 찬송입니다. 내가 노래를 잘하면 이 곡조로 한곡 뽑겠는데... 나중에 잘하게 될 때 박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여호사밧 왕의 치열한 전쟁터와 같고, 다윗 왕의 고독한 광야와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전쟁터에서도 노래할 수 있고, 광야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노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가 되고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무기가 되고 내 마음에 용기와 힘을 갖다주는 격려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
찬양은 또 왜 해야 되느냐면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찬양하면 곡조를 붙인 기도이기 때문에 아주 좋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노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괴로울 때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가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이 마음을 떠나고 긍정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혀서 굉장히 얻어맞았습니다. 등이 다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옥에 갇혀서 둘이 몸도 쓰라리고 먹지 못했으니 배도 고프고 하나님, 주님 사업하러 와서 왜 이렇게 얻어 맞도록 내버려 놓았습니까? 원통합니다. 절통합니다. 그렇게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밤중에 바울과 실리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한 노래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신앙으로 부르는 노래 들어보면 마음에 굉장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감동이 돼요. 잘 못 부르는 사람은 빨리 그치는 것이 감동이 되는데 잘 부르는 사람은 계속해서 부르면 굉장히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으니 거기에 사회 해독을 끼치는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갇혀있는데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노래를 부르니 가만 두겠습니까? 야 이놈들아 잠 좀 자자.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 옥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조용해지자 그만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노래가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손바닥을 같이 친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노래 부르고 하나님은 보좌 앞에서 그래 잘한다. 손뼉을 치니 지진이 안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차꼬가 다 끌려지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노래는 해방을 시키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전체가 일본에 36년 동안 속박을 받았지 않습니까? 압박과 설움 속에 사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니까 그 속박이 다 벗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든지 노래는 다 차꼬를 끌러버리고 속박을 끌러버리고 자유와 해방을 갖다 준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자유와 해방이 없고 가정에 슬픔과 고통의 쇠사슬에 묶여 있거든 노래를 부르십시오. 찬양을 부르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같이 하셔서 차꼬가 끌러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5~26).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곡조있는 기도인 노래를 불러 큰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처럼 우리의 삶속에 슬픔과 우울한 생각이 올 때 슬픔과 우울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잘 할 줄 모르면 잘 안 나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요. 그러나 노래는 이미 정해놓은 곡조 있는 가사이니까 그를 따라 부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병들 때나 괴로울 때나 바쁠 때나 고달플 때 하나님을 찬양하면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는 기쁨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43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찬양은 예배의 향기 나는 제사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의식적, 형식적으로 드리지 않고 성령의 아름다운 향기가 나게 되는 것 그것 참 좋습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제게 와서 묻습니다. 설교를 잘 준비해서 주일날 부흥회날 설교를 하는데 나는 잘하는데 교인들이 감동을 안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아멘을 하고 마음이 향기로 가득 차야 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른 길 아닌 기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삼십분 동안 설교하려거든 세 시간 이상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임하시면 성경은 말씀하기를 여러분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까 마음에 굉장한 향기를 냄새 맡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평안해지고 기뻐지고 정말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은 예배의 향기 나는 제사이기 때문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노래 부르면 하나님이 어떠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기뻐한다. 굉장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재료가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루 종일 부를 수 있으면 굉장히 좋아요. 그리고 찬송 부르면 그리스도의 신자인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석 달에 한 번씩 건강진단을 맡으러 가는데 한번은 내가 진찰 받으러 병실에 들어가니까 그 선생님이 저에게 청진기를 대는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나올 때까지 내 찬송을 부른다 말입니다. 그분은 내가 목사인 줄 모른 것 같은데 목사인줄 알았으면 내 앞에 찬송 안 부를 것입니다. 콧노래로... 요사이 감기 들렸네요? 노래를 부르는데 내 마음에 하나님의 향기가 비취는 것은 내가 진찰 받으면서 함께 나를 쳐다보고 나도 웃고 자기도 웃고 진찰할 병이 다 날라가 버리고 없어요. 찬송의 노래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서로를 기쁘게 하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 4절로 5절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들어오는 사람, 찬송함으로 궁정에 들어오는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셔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대대에 미치게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독일에게 공격을 당해서 런던이 다 파괴되고 국민들은 낙심천만해서 전쟁할 용기도 없어지고 이럴 때 영국의 대장군 몽고메리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어려운 고비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신문 기자들이 2차 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해야 될 태도를 가르켜 주십시오. 이 전쟁은 누가 이기겠습니까? 독일이 이기겠습니까? 영국이 이기겠습니까?” 그것 어려운 질문 아닙니까? 그러자 몽고메리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독일이 이길 수도 있고 영국이 이길 수도 있는데요. 노래를 잘 부르는 쪽이 이길 것입니다.”

여러분, 연합군의 총사령군 몽고메리가 노래를 잘 부르는 쪽이 이긴다니 장난도 아니고 그 무슨 소리입니까? 그것은 이 전쟁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정신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노래할 수 있고 그 노래하는 사람은 이긴다. 연합군은 과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싸워나갔고 결국 전쟁에 이겼던 것입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쪽이 이긴다는 것이 엉뚱한 대답 같지만 이 대답 속에 승리의 비결이 들어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이 안 되고 부도가 날 가능성이 있거든 아예 공장문 걸어 놓고 노래를 하십시오. 언제 공장이 문을 열겠습니까? 얼마 안 있으면 열거에요. 노래하고 있으니까. 장로님들 우습게 들리지요? 노래 부르십시오. 오늘부터.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교회 성도들이 많아서 일천만 성도들이 되고 가는 곳마다 찬송을 부르고 노래를 불러서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신 것입니다. 원망, 불평, 탄식하지 말고 노래를 불러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힘들고 고통받을 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면, 마음 속의 불안이 사라지고 인생은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주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봄으로 늘 감사와 찬송을 하십시다. 그럴 때 예수님이 가져온 새 안식 안에서 더욱 풍요로운 여유 있는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는 “위기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라는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드시 위험이 나쁜 것은 아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가 같이 오기 때문에 위기에 직면했을 때 90%의 사람들은 위기를 보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단지 10% 정도의 사람들만이 위기를 기회로 삼고, 감사하며 다시금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럴 때 위기는 오히려 더 큰 축복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위기를 당했을 때 90%는 불평을 말합니다.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10%도 안됩니다. 그러나 10%의 사람은 위기를 극복하고 이기게 되고 90%의 사람들은 위기에 패배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을 쓴 페리 노블 목사님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인 뉴스프링교회의 담임목사님입니다. 그는 전혀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목회자요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빡빡한 일정과 산더미 같은 책임에 치여 살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살기 싫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3년 동안이나 심각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공황 발작까지 겪으면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과 전쟁을 치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풀무불 속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내 상황보다 크신 분임을 잊고 있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려운 것만 자꾸 눈에 보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뛰어 넘어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예수님이 빌립보고 빌립아 어디 가서 저 많은 사람에게 먹을 떡을 살 수 있느냐 물었을 때 빌립은 당장 그 자리에서 저 많은 사람에게 먹일 떡만이라도 2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이 필요하고 떡 살 곳도 없으니 먹일 수 없습니다. 빌립이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빌립은 눈앞에 사람들만 보고 사람들 건너편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나도 인생을 살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 앞에 보고 그 뒤에 도와주기 위해서 서 계신 예수님을 안 보기 때문에 낙심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짐 곁에 오너라. 그렇게 말 안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짐 건너편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러므로 고개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눌리는 인생에서 누리는 인생으로 바뀌었던 것을 간증한 책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동안에 목회의 무거운 짐만 바라보고 그 배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찬양과 감사와 기도를 등한히 했습니다. 나는 안 된다. 할 수 없다. 절망이다. 어두운 데만 바라보고 예수님이 저 건너편에 계시네.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깨닫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찬송을 하고 감사하고 기도한 결과 그는 그 어려운 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눌리는 인생에서 누리는 인생으로 바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 편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어떠한 순간에도 내 편이다. 에이~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합니까? 내 편인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편이 아니면 여러분을 불러서 예수 믿도록 안 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은 것이 여러분 힘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아와서 여러분을 선택해서 믿게 해주셨으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 편에 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삶에 불어 닥치는 풍랑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주님께서 그 풍랑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면, 스트레스와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당당히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페리 노블, 2014.10)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가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서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데리고 무덤가에 왔었을 때 마르다는 통곡하며 울지요. 마리아도 울지요. 같이 따라온 사람들도 울고 야단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르다 보고 마르다야 오라버니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아라. 주님, 우리 오라버니가 죽어서 나흘이 됩니다. 이미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거기에 마르다는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오라버니만 자꾸 보고 그 건너편에 서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네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아나겠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하나님을 보고 무덤 문을 옮겼습니다. 사람보고는 옮길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나사로야 나오라! 즉시 수의를 몸에 칭칭 감은 채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말씀에는 기적이 따르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능력이 있어요. 4차원의 영성 중에 말씀을 하면 4차원의 능력이 일어나서 3차원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따라서 말씀을 사용하면 말씀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금시 A라고 말했다가 B라고 말하고 좋다고 했다가 나쁘다고 말하고 칭찬했다가 욕하고 이렇게 변화무쌍한 말을 자꾸 하면 그 말이 아무 힘도 없고 그 말은 버린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절도 있고 목적이 분명하게 마음을 다해서 말하면 그 말이 위대한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로써 여러분 살 수 있습니다.

몸이 약하고 병들거든 나는 나았다. 나는 건강하다. 지금도 힘이 있다. 씩씩하다. 튼튼하다. 한결 같이 똑같은 말을 계속하십시오. 말이 권세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약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우울한 사람은 나는 기쁘다. 즐겁다. 나는 행복하다. 주님이 기쁨을 주신다. 감사하다. 긍정적인 말을 계속하면 그 말이 밖에 나가서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말이 굉장한 에너지가 되어요. 여러분은 그런 에너지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찬미하는 것도 하나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에너지가 있고 마귀에게 향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묶음을 놓고 떠나가라! 나에게 떠나가라! 근처에 있지 말라! 이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한결 같이 그렇게 해보십시오. 귀신이 여기 붙어 있지 못하겠다고 달아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는 것 굉장히 좋습니다. 용기야~ 용기를 가져라! 힘내라! 좋은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자기가 자기보고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이라는 것은 내 속에 있을 때는 말이지만 밖으로 나오면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에너지가 되어서 자기 자신을 무장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누가 도와줍니까? 좀처럼 도와주는 사람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용기를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여러분을 승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고, 그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내가 다른 말로 할 수 없으면 긍정적인 찬양을 자꾸 하면 그 찬양이 밖에 나가서 굉장한 에너지가 되고 여러분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울할 때 감사로 이기십시오. 미국의 헨리 프로스트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했던 선교사입니다. 그가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고향에서 슬픈 소식이 전해졌고, 그로 인해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아무리 기도해도 그 흑암의 그림자는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슬프고 좌절되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교본부에 갔다가 벽에 쓰인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Try Thanksgiving (감사를 해 보라)” 그 글을 보는 순간, 갑자기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그 시각부터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무리 기도해도 물러가지 않던 마음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그의 영혼에 밝은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와 찬양은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나는 긍정적인 말이 안 나온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긍정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고통스럽고 힘들수록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3. 찬양은 입술의 고백
또 찬양은 왜 늘 해야 되느냐. 입술의 고백입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내가 믿었으면 의롭지만 나는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고 말하면 에너지가 나가서 구원을 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받을 후보가 되지만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의 능력이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변화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찬양함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9~20)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여러분을 지어놓은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 입술을 통해서 찬송을 듣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송에 굶주리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찬송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족하시고 또 여러분에게 대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고 말씀한 것입니다.

시편 147편 1절에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가장 찬송을 많이 넣은 것이 시편 150편 1절로 6절인 것입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얼마나 찬양이 중요하기에 한 페이지 전체를 찬양하라고 한 것인가.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믿음의 고백도 되고 축복의 고백도 되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무장도 되고 여러분이 행복하게 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해서 기억이 안 나더라도 이 세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내가 감사와 찬양을 드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이 그 무엇보다도 그 자손들에게 감사와 찬양을 듣기를 원하신다. 마귀의 쇠사슬이 다 끊어지고 마귀가 한 길로 와서 일곱 길로 도망칠 수 있는 무기가 원자탄과 같은 찬양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마귀가 견디지 못합니다. 어떠한 사슬이나 쇠고랑으로 우리를 묶어 놓더라도 철렁철렁 다 떨어져 나갑니다. 그 다음에 감사와 찬양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양식입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약이 되고 힘이 없는 사람은 영양분이 되고 마음에 즐거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오늘부터라도 찬양하십시오. 예배 필하고 나갈 때 옆 사람 듣던지 말던지 흥얼거리고 찬송하는 것 좋습니다.

<결론>
환경이 어지럽고 고통스러울 때 이를 극복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기도와 찬송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유창하게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기도와 찬송은 그것을 다 커버해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아멘.  
 
/2015. 2. 22. 주일설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