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기분이 좋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 고개를 끄떡이며 진지하게 들어주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따스하고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

명절 연휴 내내 우리들은 많은 담소를 나누었다. 세대를 넘나들면서 사는 이야기를 듣고 전하며 반가운 만남과 건강한 안녕을 기약했다.

세상은 공감을 요구한다. 적당한 타협과 견제를 수용하며, 서로에게 공감대가 형성하기를 원한다. 어쩌면 인생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크고 작은 공감을 근원으로 신뢰가 형성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소중한 관계들이 무너지는 상처 속에 살아가고 있다. 급격히 증가되고 있는 이혼율이나 결혼을 기피하는 청소년들의 의식은, 타인과의 공감에서 출발되는 결혼을 신뢰하지 못할 제도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건전하지 못한 파경의 가정들을 바라보면서, 교육비에 지쳐 있는 가정들의 피곤함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결혼 당사자들은 쉽게 결혼을 포기하는 사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결혼을 포기함으로 자유스러운 취미 활동이나 고비용의 여행까지를 마음대로 계획할 수 있는 기쁨이 배가되고, 허리를 휘게 하는 자녀 양육비·교육비를 지출하지 않게 됨으로 건강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의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남녀의 교제는 늘어나고 있는데, 결혼을 수용하는 남녀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교제할 상대가 없으면 그저 심심하고 따분하고, 교제할 대상을 만나면 피곤하고 거추장스럽다는, 소모품 같은 만남이 문화로 고착화되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동반되는 일방의 상처들은 불신의 사회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서로에게 공감할 수 없는 인과관계는 견제 기능만 양산한다. 절대 공감과 절대 신뢰를 근본으로 연합되는 결혼 제도가 서로에게 불이익이며 속박일 수 있다는 접근은, 건강한 후대를 보장할 수 없다.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수용하는 만남은 바보나 할 행동처럼 여기는 인식은, 아름다운 내면의 가치들을 사장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남자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남자의 갈비뼈를 근본으로 여자를 창조하시고 동거의 복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기꺼이 스스로 인생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결혼은 창조주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결혼은 극치의 사랑과 희생을 발휘하게 되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를 낳고 기르게 되는 복은 인생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해야 한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토로해야 한다. 군대 이야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증명할 수 없는 과거 이야기, 과장된 우월감, 초월, 신비를 동반한 무용담 등은 이제 제발 덮어 두고, 상대방이 공감할 수 있는 담소가 아니라면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수 있다.

공감은 입을 열 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열 때 형성되는, 상대방의 가슴에 부딪쳐야 돌아오는 메아리이기 때문이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