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 땅에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유독 ‘눈물’을 많이 흘리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과 며느리의 고된 시집살이에서 빚는 ‘눈물’, 가난에 찌들어 흘리는 ‘눈물’, 외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 자식과 부모 형제를 잃어 슬피 우는 ‘눈물’과 신세타령을 하며 쏟아내는 ‘눈물’, 자신의 대한 불합리한 대우나 환경, 그리고 서러움에서 주로 쏟아내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을 위한 ‘눈물’보다, 이웃과 백성들과 나라를 위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와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눈물’의 성격이 차이가 있음을 성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고(눅 19:41), 나사로의 무덤을 보시고 우셨습니다(요 11:36).

특히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보통 7일간을 애곡하는데, 대부분은 애곡하는 여인들을 불러 장례가 끝나기까지 합니다. 우리 문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울음꾼들을 부르며, 둘 이상의 피리 부는 악사들을 고용하여 장례를 치릅니다. ‘눈물’을 대신 흘려줄 애곡하는 여인들을 고용할 정도로 ‘눈물’이 많은 민족인 것입니다. 특히 곡하는 부녀들은 히브리 관례상 상가(喪家)에서나 국가적 애사(哀史)에서 전문적으로 통곡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눈물’이란, 주로 격한 감정(주로 슬픔, 기쁨, 혹은 분노)이나 고통을 느낄 때, 하품을 할 때나 따가운 것이나 이물질이 눈에 들어갔을 때 또는 아플 때, ‘눈물샘’에서 노폐물과 같이 배출되는 수분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항상 눈에 물기가 있기 마련인데, 극히 피로할 때 눈이 뻑뻑해지는 이유는 ‘눈물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3초마다 한 번씩 눈을 깜박여야 ‘눈물’로 안구를 촉촉하게 적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못해 눈이 건조해지면, 심할 경우 각막손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배 때마다 ‘눈물’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교인들을 봅니다. 부흥사경회나 각종 예배를 드릴 때마다 통성으로 소리 지르며, 교회가 떠나가도록 울분을 토합니다, ‘눈물’은 얼굴 전체에 범벅이 되고, 심지어 콧물까지 흘리면 얼굴이 엉망이 되어 보기에도 심히 민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눈물’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훌쩍이며 통곡의 기도를 하지만,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전쟁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주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으면, 예배가 끝난 시간만큼은 평화와 화목의 장이 열려야 하는데,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고 눈을 부릅뜨면서 금방이라도 내리칠 기세로 폭력적인 행동을 나이 구분 없이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 때의 그것은 곧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요? 신용 불량자들이 짓는 한숨이나 눈물이 아닐까요?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은 위정자를 빗대어 말하는 통속어로, 악어가 먹이를 씹으며 동물의 죽음을 애도하여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특히 패배한 정적 앞에서 흘리는 ‘위선적인 눈물’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입니다. 악어의 눈물은 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악어의 눈물 은 가식, 거짓으로 풀이하지만, 사실 단순한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그 성도들은 참회의 합당한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보다 먼저, 자신의 죄와 잘못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기도가 참 회개의 ‘눈물’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믿지 않은 불신자들보다 못한 언어폭력과 폭행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볼 때, 정말 주님과 함께 하시는 분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불리하면 온갖 트집을 잡으면서, 연로하신 어른들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다가도 예배 시간이 되면 ‘눈물’로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수고하시는 목사님들께서 제발 제대로 교육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진실된 예배와 기도를 훈련시켜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리들은 ‘삶’ 속에서 자신을 위한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 이웃의 슬픔과 기쁨에 흘리는 ‘눈물’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최고이며, 천국으로 들어가는 우대신용자 역할을 합니다.

무조건 기도만 하라고, 예배에 참석하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예배와 기도를 교육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가 아닌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제자가 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과 직장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늘 기도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눈물’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웃으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주님은 슬픔의 주님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하시기를 바라고 원하십니다. 교회에 나와 기도만 하면 ‘눈물’부터 흘리는 습관적인 교인들이 많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눈물’에는 자신의 철저한 반성과 회개가 우선돼야 하며, 그 다음 교회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형제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통곡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는 성실한 자세로 기도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언행일치가 되어야 기도의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기록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은 사람을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고 겸손하게 만드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만들어주신 ‘눈물’에는 많은 사람들 가슴의 상처를 위로해 주며, 나 자신을 순화시키고,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식적인 눈물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할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한다면, 그 ‘눈물’은 변화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웃과 나라와 백성과 세계 인류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기도는 시간낭비이며 헛수고를 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불행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가식적인 눈물로 ‘믿음의 신용불량자’가 되지 말고, 진솔하게 주님과 소통하는, ‘믿음의 신용우량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