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1. 성경의 무오(無誤, inerrancy)와 무류(無謬, infallibility)는 어떻게 다른가

이 두 단어는 성경의 신적 영감과 관련돼 있다. 성경의 무오란 성경이 모든 역사적·사실적 문제에 있어 잘못이 없다는, 성경의 무류란 성경이 모든 신앙과 도덕적 문제에 있어 잘못이 없다는 의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서들은, 이와 같은 성경의 신적 영감을 인정하고 있다. 즉 성경이 단순히 인간이 만든 책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특별한 계시의 책임을 고백한다. 또한 신학은 본질상, 무류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무오에 좀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2. 개혁주의의 성경관

개혁주의도 성경과 하나님 말씀을 동일시한다. 즉, 성경을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성경이 말하는 바는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What the Bible says, God says)으로 본다. 프린스턴신학교의 찰스 핫지는 계시를 영감보다 더 기초적인 것으로 보고, 계시가 신적 메시지의 내용을 제공하는 반면 영감은 메시지의 내용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핫지는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란 증거의 문제를 다루면서  (1) 성경은 내증(internal verification)이 있으며 (2) 외증(external verification)이 있고 (3) 진리에 대한 증거를 ‘보는 것’과 그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다르며 (4) 이성은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바꾸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구 프린스턴신학교의 성경무오설은 벤자민 워필드(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를 거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그레샴 메이천으로 이어졌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첫 교수 논문집 제목도 <무오한 말씀>(The Infallible Word, 1946)이었다. 또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이 성경에 대한 최고의 해석자’(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the Bible is its own best interpreter)라는 원칙을 수용하였다.

3. 성경 무오와 관련하여

성경 무오와 관련하여 말할 때는 믿음과 사실을 구분하여 언급해야 한다.

1) 믿음
(1) 성경 원본의 무오에 대한 믿음

성경 무오란 바로 성경 원본에 대한 무오를 의미한다. 물론 지금 우리 손에 성경 원본은 없다. 그리고 성경 원본 무오가 사본들에 무슨 결정적 문제가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 시체를 감추신 것처럼 원본을 감추신 섭리를 인정하고, 원본의 무오를 인정하는 것이 성경무오론의 전제이다. 1910년 미 장로교 총회가 진술한 (목사 안수에 필수불가결한) 5개 근본교리들 가운데는 성경 원본의 무오성이 있다. 그 다섯 가지는 (1) 성경 원본의 무오성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실재성이었다. 이것은 모두 믿음의 영역이다. 1949년 형성된 미국복음주의신학회(The Evagelical Theological Society)는 “성경만이, 그리고 성경 전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원본에 있어 무오하다”고 했고, 1977년에는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성경 권위의 불가결한 요소인 성경 무오 진리를 밝히고 입증하고 적용하는 데 단합”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들 조직은 모두 성경 권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사본들의 유용성에 대한 믿음
성경 무오와 관련하여 원본에 대한 무오성을 믿는 신자들은 사본들까지 전적으로 무오하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사본들 간에는 일부 당연히 상이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본의 무오성을 믿는 동시에 각 사본들 간에 나타나는 상이점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통해 원본의 참 뜻을 성실하게 추적하여 드러낼 필요가 있다.

2) 사실
성경이 무오하다는 믿음에 있어서도 다음의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진리의 기독교가 아니라 국수적 기독교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언어
성경은 말씀, 즉 언어로 전해졌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언어가 모든 것을 분명하고 정밀하게 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미숙하신 게 아니라 인간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가렸기 때문이다. 언어는 또한 역사적으로 늘 변신의 길을 걸어왔다. 즉, 언어는 시대성을 가진다. 우리 시대의 ‘된장녀’라는 단어와 20년 전 ‘된장녀’라는 단어의 뜻이 전혀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처럼, 언어는 모든 민족 모든 시대에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논산훈련소>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단순한 실체적 단어임에도 남자와 여자가 받는 느낌이 다르고 한국인과 외국인의 인식이 다르다. 같은 남자라도 논산훈련소 출신자와 출신자가 아닌 이들의 인식은 전혀 다르다. 또한 같은 논산훈련소 출신이더라도 입소한 시기마다, 장교와 조교와 훈련병마다 느낌과 인식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탈북자들과 북한 여행객들이 느껴서 표현한 북한 실정은 다른 것이다.

이렇게 언어는 모든 것을 정밀하게 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사람은 같은 단어를 동상이몽식으로 해석하고 느낄 뿐이다. 또한 인간은 언어를 통해 필연적으로 감정적 오류(affetive fallacy)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 무오를 믿는 보수신학자 사이에서도 서로 입장이 달라지고, 반론을 펴고 때로는 반목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무오하더라도, 이를 수용하는 신자나 독자는 미숙한 해석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왜곡할 가능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성경의 계시와 영감을 이해하고 교회의 역사와 전통과 교리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성령께서 인도해 주심을 진지하게 기대하면서 바르게 성경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2) 과학
성경은 과학자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무오한 성경은 모든 역사, 시대, 민족, 남녀노소, 지식고하, 빈부귀천을 초월한다. 즉 성경은 과학에 적응한 책이 아니라, 모든 역사와 사람에 적응(accommodation)한 책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반증 가능해야 과학이라고 말한다. 즉, 과학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반박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초월의 책 성경은 창세기 1장 시작부터 반증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성경을 과학책처럼 인식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 해석에 과학의 언어를 잘못 적용하면, 일반 언어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오해를 불러오게 된다. 만일 성경이 쓰여진 수천 년 전, 21세기를 겨냥하여 컴퓨터와 디지털 사회에 대해 상세히 가르쳤다면, 디지털 사회를 맞지 못한 민족과 세대들에게는 수천 년 동안 불필요한 오해를 제공했을 수 있다. 성경무오론은 과학의 이러한 독특성을 수용한다. 물론 성경이 과학책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성경은 충분히 과학적이기는 하다. 과학을 만드신 분도 성경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잘 이해하여, 성경 해석에 있어 불필요한 긴장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3) 사본
완전 무오한 사본은 없으나, 사본을 통해 원전을 추적하는 일들은 여러 경우 가능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성경학자들이 땀 흘려 연구하고 수고하여 이룩한 성과이다.

(4) 문자적 축자성의 의미
성경이 무오하더라도 수용하는 사람들의 관습, 언어, 문화, 과학, 역사, 사회 체험 등의 영향 아래 문자적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위에서 설명하였다. 따라서 성경 무오가 문자적 축자(literalness)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5)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이해
과학의 언어로 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계시의 점진성 때문이라고도할 수 있다. 66권 성경은 단숨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계시는 오랜 기간 단계적으로 주어졌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저자들보다 더 점진성 가운데서 계시를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즉 신약 저자들은 하나님의 경륜 아래서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계시의 점진성이다.

(6) 무오라는 말의 다양성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오를 믿는 사람들 안에서도 무오라는 말의 개념은 다양하게 쓰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무오란 과학적, 역사적, 문자적 절대 무오(absolute inerrancy)를 말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인격적 교제를 위해 무오하게 주셨다는 목적의 무오성(inerrancy of purpose)을 말하고, 어떤 이는 인류 구원과 관련하여 무오함을 믿는 제한적 무오(limited inerrancy)를 말한다. 이들 다양한 무오의 견해들 간의 틈새는 그리 쉽게 메꾸어질 것 같지는 않다.

위와 같은 이유로 사람은 마치 성경을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남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과 말씀 앞에 늘 겸손해야 한다. 토렌스(T. F. Torrance)가 말하듯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로 완전하더라도,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 성경을 이해할 수는 없으며 유리를 통하여 보듯 어렴풋이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의 완성은 파루시아와 죽은 자의 부활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때로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성도는 성경과 기독교를 잘 안다는 듯 교만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을 믿고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겸손함을 갖추고 우리 신앙의 훌륭한 선배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존중하면서 바른 성경 해석과 실천에 정진해야 한다. 성숙한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해야 함도 바로 그 때문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