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사랑은 정말 강렬하다. 그런데 그 사랑은 강렬하면서도 종말론적이다. 종말처럼 강렬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사랑도 그와 같다. 그 뜨겁고 강렬한 종말적 사랑이 이긴다! 간절한 마지막 종말론적 사랑의 모습을, 신랑과 신부의 노랫소리로 들어보자.

1) 사랑은 듣고 싶어한다(신랑의 노래)

사랑은 소통이다. 신랑은 신부의 소리를 영원히 듣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해 늘 듣고 싶어한다. 친구들도 사랑의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한다. 지극한 사랑은 이렇게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흥밋거리이다. 친구들이 그 사랑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고 찬양하며, 사랑에 관한 한 영원한 팔불출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이것이 종말론적 영원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듣고 싶어하고, 하나님께 들려주고 싶어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 사랑을 듣고 싶어한다. 기도하라! 부모가 자녀의 소리를 듣고 싶듯, 창조주 하나님도 우리들에게서 음성을 듣고 싶어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자녀)의 소리를 듣고 싶고, 사랑의 울림을 들려주고 싶어한다. 기도와 찬송, 예배와 설교가 모두 듣고 들려주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영원히 듣고 싶고, 영원히 들려주고 싶은 그 울림을 따라 종말적 영원으로 나아간다.

2) 사랑은 늘 만나기를 갈망한다(신부의 노래)

만남이 부담스러우면 사랑이 아니다. 사람은 늘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를 갈망한다. 부모는 자식을 늘 갈망한다. 외국으로 떠난 딸, 지방으로 내려간 딸, 군대로 간 아들,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실 헤어진 자녀를 다시 만나고 싶은 안타까운 갈망은, 부모가 되어 보지 못하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사랑의 감정은 타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을 알고 타인을 사랑하려면, 그 갈망이 강하다면, 신부나 수녀처럼 살지 말라! 결혼하라! 부모가 되어 보라! 하나님의 참 사랑도 그렇게 알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어찌하랴!

3) 하나님 사랑은 종말적 영원한 갈망(영원한 짝사랑)이다

사랑이 맺히려면 간단하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짜릿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상하다. 세상의 짜릿한 사랑은 마음껏 즐기면서, 하나님과는 별거하고픈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누구 때문인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 사단이다! 하지만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요. 하나님의 본체가 사랑이다.

4) 사랑이 결국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창조주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 누가 우리를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호 1:23~2:1, 14:4)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게 세상의 쾌락이 달콤한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동물만도 못하다. 동물만도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추악하고 패역하다. 고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마귀의 유혹으로 타락한 인간은 마귀처럼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거부하고 대적하며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한다. 고릴라보다 더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 빰을 치거나 방망이로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은 극형에 처한다. 패역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침팬지보다도 고릴라보다도 미련하게 살 것인가? 값진 사랑을 하며 살 것인가!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부르셨다. 여기 성경의 결론을 보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거져 주셨다’(엡 1:4)! 죄와 고통은 인간이 저지르고 예수는 그것을 짊어지신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어찌 죄와 악과 고통으로 이렇게 세상을 뒤덮을 수 있느냐고 허공에 따지며 탄식하지 말라! 죄와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시는 이 역설적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죄와 고통까지 녹이는 그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오묘한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 복된 죄악이여’(O! felix culpa!)라고 고백한 성 어거스틴의 절창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많은 예수의 사람들이, 영광의 예루살렘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불성곽’을 바라보며 십자가 성문 밖으로 나아갔다.

이 비밀한 사랑을 알아야 사랑은 완성된다! 성도는 주님과 교회와 천국을 갈망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갈망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자녀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랑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랑을 보라! 노루가 향기로운 산에서 뛰놀듯,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나라(향기로운 산)로 영원히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랑을 보라! 남녀의 사랑은 강렬하다. 부모와 자녀의 사랑도 강렬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와 자식, 연인 간 사랑보다 강렬하다. 하나님이 바로 부모와 자녀와 남자와 여자와 만물을 만드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모두모두 그 사랑으로 나아오라! 사랑은 모든 것의 결론이요 결국 사랑이 이긴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에.

사랑 풍경22- 사랑, 그 노래

그가 잠들기 전에 먼저 새벽을 깨우고
그의 남은 어둠을 걷어내야 한다
그가 잠들기 전에 십자가 예수는 울어야 하고
그가 잠들기 전에 사랑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 그 아픈 곳으로 건너가라
사랑하는 이의 아픈 자리로 건너가라
슬픔이 어둠을 몰아낼 때까지
슬픔이 슬픔의 따뜻함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리하여 슬픔과 고통이 사랑이 될 때까지

그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이 세상 사랑이 그리워질 때까지
그 사랑의 중심으로 가라
사랑이 사랑을 품을 때까지
그리하여 이 세상 모두가
사랑으로 사랑을 이기는
온 세상 모두 영원한 사랑이 될 때까지
그 사랑의 사랑으로 건너가라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