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12월 14일
본문: 누가복음 4:18-19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눌린 자를 자유하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누가복음 4장 18-19절]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송정미 사모님이 불렀던 찬양이 생각납니다. “자유를 선포하라!”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가장 명백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모든 억눌린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심입니다.
눈을 보지 못하는 것도 비참하고 힘든 일입니다. 가난과 질병 가운데 사는 것도 말이죠. 하지만 더욱 비참한 것은 보지 못함도, 가난함도, 질병도 아니라 그 아픔 가운데 눌려있는 것이죠. 대강절이 시작되면서 계속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악한 것과 사람들 때문에 우리를 찾아옵니다. 주님은 그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마가복음 5장은 계속되는 치유의 기적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마지막은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울고 통곡함을 보시고 하신 일입니다. 회장장의 딸이 죽어 사람들이 다 울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39~41절)
오늘 “눌린 자를 자유하게”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저에게 떠오른 한마디의 말이 있습니다.
“일어나라!”(달리다굼)
오늘도 예수님께서 자유의 복음을 진리의 해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복음은 우리의 능력으로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가게 합니다. 질병과 가난과 흑암의 권세에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운명을 헤치고 나가라!’
죽음의 흑암 권세를 향해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와 죽음에 대하여 부탁하거나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명령하는 사람들입니다.


눌린 자를 양산하는 사회
이전에 그렇게 의미 있게 부르지 못했던 찬양의 가사 중에 “이 땅 고쳐 주소서.”라는 부분이 참 많이 와 닿습니다. 눌림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이기심과 자기 중심주의가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빛 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생 신드롬”이라고 불릴 만큼 드라마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미생이라는 말이 아직 살지 못한 것인지 죽지 못한 것인지, 한 계약직 사원의 처절한 몸부림이 많은 공감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주인공 장그래와는 대비가 되는 모든 스펙을 갖춘 입사 동기 장백기도 처절한 몸부림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죠.
세상의 구조 속에서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인해 좌절하는 인간,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의 열심을 보면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의 열등감의 감옥.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적 구조악과 이기적인 제도 속에서 힘들어하는 주인공 장그래를 정말로 생각하고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도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조차도 시기하며 미워하기에 자신을 감옥에 가둬버린 사람이,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미워할 사람이 아니라 품어주고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말입니다.

혹시 “빠삐용”이라는 아주 고전적인 명화를 아시나요?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한 영화죠. 이 영화의 주인공 빠삐용은 살인죄 누명을 쓰고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누구도 탈출할 수 없는 극한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입니다. 탈출의 이유는 너무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빠삐용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검사에게 보복하기 위해 수없이 탈옥을 감행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호의 탈출 기회를 맞게 된 빠삐용에게 드가라는 친구가 말합니다.
“이 섬에서 탈출하더라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증오가 가득 차 있으면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빠삐용이 탈출에 성공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운이 남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끝났지만, 뒷이야기가 있다고 하죠?
남미로 가서 돈을 번 빠삐용은 검사를 찾아다니지만, 끝내 찾지 못합니다. 빠삐용은 친구 드가의 말처럼 자유로운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검사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살아갑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 빠삐용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 들어가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하던 중에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가득 차 있던 원한과 울분과 복수심이 사라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빠삐용은 “주님, 그를 용서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라고 고백하며 비로소 참 자유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탠퍼드 대 경영학과 교수인 Chip Heath와 그의 동생 Dan Heath는 2007년 발간한 [Made to Stick]이라는 책에서 “지식의 저주”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 때문에 보지 못 하는 것이 저주입니다. 세상이 빛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을 힘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은 ‘힘’을 가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한 번도 힘으로 정의로워지지도 공평한 세상이 만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나로서는 말이야.”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구조적인 모순 속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 미래를 위한 M Vision Project를 하면서 느낀 것입니다.
만나교회의 장단점을 논하는 Workshop에서 제가 놀란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장점으로 느껴지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단점으로 느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몸담은 부서를 중심으로 다른 부서를 판단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을 중심으로 다른 사역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서운한 것도 많고 불평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만을 어떻게 다 들어줄 수 있지. 물론 제 개인에 대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하는 자유 같지만,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기 생각과 삶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내 생각과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보이고, 타인이 보이기 시작할 때 주어집니다. 억눌림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삶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합니다.

지난해 발칸반도의 사라예보라는 도시를 지나며 인간의 잔인함과 비참함을 보았습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도시 사라예보는 끊임없이 종교적 우월감을 내세우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 그리고 인종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현대사의 최장 기간 도시를 포위하고 세르비아인들은 마치 연못에서 오리를 사냥하듯이 1만 1천 명의 사람을 저격해서 죽였습니다. 그중의 1,600명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공동묘지에는 자리가 없어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축구장을 시체 매립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수년 전 케냐와 탄자니아를 거쳐 르완다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학살의 현장과 거대한 무덤을 보았습니다. 1994년 4월부터 7월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서 약 100일 동안 1,174,000이 살해당한 것으로 정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에 수많은 여성이 남편을 잃고 강간을 당해 지금까지도 수만 명이 HIV에 걸렸고 현재 약 40만의 고아가 있는 땅입니다. 두 개의 지배 종족이 정권을 잡기 위해 한 종족을 그렇게 무섭게 죽일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전쟁은 전쟁으로 끝나지 않고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가족도 찢어 놓았습니다. 르완다에서는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살기 위해 남편이 아내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사라예보에서는 형제가 서로 다른 쪽을 선택해 총을 겨누어야 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만일 인류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보복하며 산다면 결국 눈과 이를 가진 인류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제가 오늘 너무 거대한 국제적인 이야기들로 혼란스럽게 했나요?
사실은 우리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억눌린 일, 학교에서 경험하는 선후배, 사제간의 관계에서도, 남자라면 경험하는 군대에서의 계급 관계, 직장에서의 상하관계, 아니 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서 경험하는 지배의 강력한 논리 역시 우리가 풀어야 하지만 풀 수 없는 영원한 지배논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진 자에 의해 갖지 못한 자는 늘 자유를 속박당하고, 억울한 일들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대강절”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눌린 자에 대한 원한과 누르는 자의 지배력을 무력화시키시겠다는 선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눌린 자에게 찾아오신 주님
이런 인간의 불안함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 시편인 듯합니다. 인간은 불안했고, 낙망했으며, 죽음의 나락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인간 심연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떠나 있으신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의 한가운데 늘 계셨습니다.
시편의 사분의 이는 탄식의 시입니다. 하지만 모든 탄식이 찬양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고통 가운데 힘들어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역사 가운데 눌린 자였고 포로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여 주셨다고 믿는데, 너무나 오랜 세월을 억눌리며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1장 2절과 3절에서 민족이 당하는 아픔 가운데서 조금 더 직설적으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억압과 불의한 폭력 가운데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설명을 구해야 합니다. 악이 존재하고 악한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억압은 당연히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억압의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찬송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장 목가적으로 생각하는 시편 23편은 사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렇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0~17절에 보면 오랫동안 사탄에게 억눌린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에게 눌려 있던 여인의 비참함, 그러나 그 여인은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신 그 일이 회당장의 눈에는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배 계층을 형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보다 못한 자가 존재해야 하는 듯합니다. 누군가 고통을 당한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죄를 지었든지 열등한 존재든지.
인류 역사 가운데 인간이 인간을 노예 삼아서 부리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일 수 있었던 일들이 크리스천 국가에서 자행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선택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정당한 인간의 논리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논리가 전혀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6절입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여인 역시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인간들을 위해 주신 ‘안식일’에 하나님의 딸이 억눌림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문제는 이 일이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눌린 자에게 찾아오셔서 자유를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동안 인류는 정의라는 칼을 가지고, 힘을 가지고 사회적인 구조 악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해 싸움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논리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제가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이 느낀 일입니다. 내 속이 참 많은 열정이 있어서 교인들을 이끌어가려고 했습니다. 참 변하지 않는 교인들 때문에 좌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변하지 않는 교인이란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할 뿐이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목회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은 내가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사람들이 목회자를 이해하려고 들 때라고 말입니다.
내가 강할 때보다 내가 약하고 힘들 때 병이 들었을 때 교인들은 목회자를 많이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게 복음이구나!
사도 바울이 약함을 강함이라고 고백했던 것, 예수님께서 칼과 권력을 가지고 궁궐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서 가장 약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구나!
세상을 바꾸기를 원했던 당시의 많은 사람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수없이 많은 불의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일을 꿈꾸었으나 소중한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 목요일 중앙우체국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기업과 자원봉사자의 후원으로 500명이 넘는 어려운 사람에게 출산용품을 보내는 행사입니다. “위대한 일을 꿈꾸던 저에게 눈앞에 있는 필요한 일을 하라!”는 사명으로 시작한 WHB가 몇 년째 하는 행사입니다. 저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지난해 선물을 받고 편지를 보낸 어떤 다문화가정의 임산부였습니다. 정말 초등학생만도 못한 글씨로 맞춤법도 틀리게 써 보낸 편지에,
한국에 와서 사는 것, 아이를 낳는 일이 이렇게 힘들었던 때, 누군가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찾아준 행복이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안녕하세요, 저는 레지나 셀마라고 합니다.
저는 네팔에서 왔어요.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에 출산용품을 받았어요. 그래서 많이 행복하고 기뻤어요.
우리 아가도 너무 좋아할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 선물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한국에 시집와서 이런 선물도 받고 시집 오길 잘한 것 같아요.
남편도 너무 좋아해요. 앞으로 우리 아가가 태어나면 행복하게 잘 살게요.
고맙습니다.

저는 서귀포시 다문화가정 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쩐 티미한입니다.
저는 지금 임신 3개월째입니다.
얼만 전에 서귀포시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에서 옷, 수건, 분유, 젖병, 가방, 면봉, 젖병 세척솔 등 출산용품(11가지) 받았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고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결혼이주여성들에게도 이와 같은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자유하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서 보셨던 것은 단순한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열여덟 해 동안 사단에게 눌려서 당한 고통이었습니다. 사실은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고통에 억눌려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고통과 질병의 문제가 모두 억압이라면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시는 증거도, 하나님의 역사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함을 얻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질병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질병을 이기고 컨트롤하는 것입니다. 같은 질병의 문제를 놓고 저주 속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중앙우체국에서 행사를 마치고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메스컴을 통해 익히 들어서 아시겠지만, 물티슈 문제로 우리 교회 사업가인 몽드드 대표가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누군가의 음해였고 이제는 모든 것이 밝혀졌지만.
제일 힘들었던 일은 돈을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답니다. 묵묵히 반품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주며 견디고 있었는데, 어느 주일 많이 울었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느 때보다 하나님과 가깝게 살려고 노력했고, 선교했고, 후원했고.
그런데 새아기 축복 때 부모들에게 몽드드 물휴지를 나눠줄 때 자신을 비난하고 믿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그날 참 많이 울었답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이때,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나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똥 묻은 휴지를 보내서 반품을 해달라는 사람들, 세상의 비난을 어떻게 견디나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답니다.
“아들아! 만일 네가 나와 가까이 있지 않을 때 이런 일을 당했다면 너는 나를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나와 가장 친밀한 때 이런 일을 당하며 나에게 기도하고 나와 함께하지 않니?”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가장 완벽한 물휴지를 만들도록 고민하고 개발하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지금 그 회사가 얼마나 회복됐고,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억압과 어둠,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유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악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유함과 승리를 선포하는 것 말입니다.

마가렛이라는 스코틀랜드 여자가 인후암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병실로 찾아가 위로했습니다. 목이 아파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종이에 이렇게 썼습니다.
“암이 최악의 것은 아닙니다. 암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파괴할 수 없고, 소망을 깨뜨릴 수 없고, 믿음을 부패시킬 수 없고, 평안을 갉아먹을 수 없고, 확신을 무너뜨릴 수 없고, 우정을 죽일 수 없고, 우리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 없고, 용기를 눌러버릴 수 없고, 성령의 불을 끌 수 없고, 예수님의 능력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기 암과 싸우면서 항암제가 나쁜 암세포를 죽인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제 고통스러운 시련을 항암제처럼 사용하시어 제 안에 있는 이기적인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것을 모두 멸하고 죽이고 없애소서.”

우리는 고통에 억눌릴 수도 있고 고통에서 자유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자유를 선포해도 이 세상의 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은 더 무서운 재앙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오신 주님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기쁜 소식은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것에서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모두 자유를 크게 외쳐라!”

지난주에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던 고통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에게 고통의 문제는 ‘이유’가 아닌 그 어려운 상태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고난의 시간을 지날 때마다 원인을 찾으려 하고 그 원인을 찾아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원인을 찾아도 우리는 그 고통의 늪에 점점 빠져들 뿐입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면 해결될 것처럼 보였지만, 그 비난은 또 다른 비난을 찾아 나서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세월호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고가 나자 모든 사람이 원인을 찾아 비난했습니다. 무책임하게 탈출한 선장과 선원, 그 배의 주인, 무책임한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대통령에게. 그렇게 비난하며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아무도 그 추운 바다에서 침몰한 배 안에서 1시간 이상을 버틸 수 없다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두려워했습니다. 희망을 품었던 에어포켓이라는 것도 세월호 같은 배에서는 생기지 않는다는 진실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현실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비난으로 돌려 상처를 줬을 뿐입니다.
지쳐갈 무렵 호재가 생겼습니다. 어느 국회의원의 ‘슈퍼 갑질’과 유가족 대표들의 뻔뻔함으로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회의 구조에 면죄부를 주는 이유와 먹잇감이 생겼을 뿐입니다.
그 원인을 찾으면 누군가의 한풀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주님은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셨고, 그 마음을 아는 자들이 그들과 함께 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대강절을 지나며 이 민족을 생각하며 참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리 서로를 의인이라 생각해도 전혀 의로워지지 않는 나라를 보면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시기를 대망했던 이스라엘 땅에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싸워서 이기거나 증오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억눌린 자의 아픔을 덜어주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저 귀신들린 자의 악한 영을 물리치셨고, 병든 자의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사회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대한 일보다 예수님께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사회적 복음”이나 “개인적 복음”이냐의 문제를 놓고 서로를 비난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회적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개인이 변화되어도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복음의 역사이겠습니까?
대강절을 지나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 주변에 눌린 자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죠.
이제는 어떤 악한 영에 눌려 지내지 말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진리의 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진리를 기다리는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대강절은 기대의 날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