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12월 14일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1~23
설교: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도 바울 당시만 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들의 당대에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 주님의 재림이 이루 어지지 않았는데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놀라고 그러면 그들의 사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궁금해하거나 염려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과 질문에 사도 바울은 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살전4:13-17을 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서 요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그 이전에 죽은 신자들도 다 일어나 그때 살아 있을 신자들과 함께 동시에 완성된 하나님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히 복된 삶을 시작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가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이 답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주의 날”이라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주의 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1:8) 또는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1:14)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1:6) 또는 단순히 “그 날”(살후1:10)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 자신도 그것에 관하여는 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도둑이 “나 언제 당신 집 털러 가겠다.” 예고하고 오는 일 없고 어느 날 밤 갑자기 들어오듯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도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특히 자주 나타나는 이단들이 주님 재림의 때를 예언하는 이단들입니다. 즉 지구 종말의 때와 시기를 정확하게 명시하는 이단들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이단들의 예언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이단들의 예언은 맞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든 그때를 예언하는 순간 그는 자기가 이단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과 다시 만나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행1:7)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을 제대로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이단에 쉽게 홀리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날이 언제 올지를 가르쳐주지 않으신 것은 우리를 위하시는 일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날을 안다면 대부분은 실컷 죄 지으며 살다가 주님 오시기 직전에 회개할 궁리들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정말 난장판이 되고 죄악이 넘쳐서 평안히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음을 다른 비유 하나를 더 들어 설명합니다.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아직 멀었지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닥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도 갑자기 닥치리라는 말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고 그때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날이 피할 수 없는 멸망의 날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주님을 맞을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각성시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4절 이하에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믿음의 준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권면합니다. 먼저 본문 4-8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밤이나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낮과 빛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밤이나 어둠에 속한 자들은 항상 잠들어 있고 술 취해 있는 자들 같기 때문에 주님의 날이 그들에게는 도둑 같이 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에 속한 사람들은 깨어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것은 영적 싸움을 싸울 무장을 잘 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잘된 무장을 말하는 것이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쓴” 상태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3요소입니다. 호심경과 투구는 사도 바울이 엡6:11-17에서 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 두 가지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 전체를 대표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는 것은 주님의 날에 대비하여 우리의 신앙의 무장을 완벽하게 하자는 말입니다.

주님의 날에 대비하여 신앙의 무장을 완벽하게 할 것을 권면한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그 날이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깨어 있든지 자든지”라고 한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 “살아있는 사람이든 이미 죽은 사람이든”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날에 대비하여 신앙의 무장을 완벽하게 하는 일에 있어서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신앙공동체의 모든 지체 사이의 협력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곧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권면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을 지키기가 힘든 박해와 환난의 시기일수록 신자들 상호간의 관심과 협력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1-14절입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4절에서 말하는 “게으른 자들”은 자기 생계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가리키기보다는 주님의 재림의 날과 관련해서 그 날이 임박했다는 그릇된 생각 때문에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켜서 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음이 약한 자들”이나 “힘이 없는 자들”은 영적으로 약한 교인들 즉 기독교의 믿음 안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신앙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권면합니다. 본문 15-17절을 또 봅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문자대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며 24시간 쉬지 않고 기도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의 뜻은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하시는 일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와 인내와 기쁨과 보람과 선한 결과를 주실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며 하라는 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흑인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권행진을 하면서 “나는 발로 기도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또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 빨리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하고나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더 크게 응답하실 것을 믿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권면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도 바울은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에든 응답하시고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놀라운 모양으로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 일 저 일 골라서 감사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범사를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있어서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알라는 뜻이라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덮쳐서 사람이 죽는다든가 토막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 자체를 감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감사할 일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재해 자체는 불행한 일이고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행위는 정죄 받아 마땅한 일이며 그 피해자들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섭리를 깨닫거나 확신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이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계속됩니다. 본문 19절에서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여러 가지 은사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억압하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2:8-11에서 쓰기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또 그 28절에서는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12:4-7에서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역사하셔서 각 사람에게서 나타내시는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다양하고 다 교회를 위하여 유익한 것인데 어떤 은사를 멸시하거나 어떤 직분을 얕잡아보거나 어떤 사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찬양대원도 귀하고 주일학교교사도 귀하며 구역장도 귀하고 전도부원도 귀하며 경조부원도 귀하고 주차봉사나 친교봉사도 다 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사무직원들도 귀하고 경비직원들도 귀하며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도 귀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의 모든 지체가 서로 각자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본문 20절에서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미래 일에 대한 말씀이라기보다 성령에 의해 영감 받은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방언이나 통변 등과 같은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하는 사도 바울 자신과 같은 사도들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에 의심을 품게 하며 그가 전하는 말씀의 신뢰성을 훼손시키려는 자들의 불순한 의도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한 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본문 21-22절에서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합니다. 예언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사람이 전한다고 해서 멸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그 예언이 정말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악령에 의한 것인지를 잘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행한 권면들을 한 데 묶어서 하나님께 기원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앞서 행한 모든 권면이 성도들로 하여금 온전히 거룩해지고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흠 없게 보전되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준 주님 다시 오실 날에 대한 가르침과 그 날에 대비한 신앙의 권면들을 역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권면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