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사람들은 ‘일등’에 도취되어 있다. 이등·삼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더구나 꼴찌를 죽음만큼이나 싫다. 누구나 ‘제일’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름도 제일이 많다. 제일양복점, 제일은행, 제일교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일류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일등·제일·일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세계이다. 일등 인생이 되고 싶지만, 일류 인생을 살고 싶지만, 우리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낙담되고, 사람들이 밉고, 세상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반항하고 일탈을 일삼는다.

꿈꾸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서 자녀들이 흔들린다. 취업이 되지 않아서 청년들은 괴로워한다. 결혼하려고 해도 집도 없고, 취업도 안 된다. 그러니 결혼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마음은 괴롭고, 세상이 원망스럽다.

이제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한 해를 정리해 봐야 할 때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뭔가를 점검해 봐야 한다. 잘 살아왔는지? 잘못 살았는지? 이 양자를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무엇인지도 재고해 봐야 한다.

성탄절이 다가온다. 당연히 성탄의 의미도 다시 한 번 음미해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일류 인생을 사셨다. 그러나 그분이 사셨던 일류 인생은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류 대학인가? 일류 기업 취직인가? 일등 배우자와의 결혼인가? 화려하고 웅장한 출세인가? 사람들의 웅장한 박수갈채를 받는 것인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데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기대와는 달랐기 때문에. 세례 요한마저도 갈등할 정도로.

그럼, 예수님은 이류·삼류 인생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일류 인생이었다. 잘 산 인생이다. 승리한 인생이다. 비록 하늘 영광의 세계를 버리고 땅의 세계로 추락하셨지만. 화려한 궁중이 아닌 초라한 여관의 마굿간 여물통이었지만. 화려하고 웅장한 헤롯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 동네에서 태어나셨지만. 상류층 인사들을 등지고, 가난하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하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지만. 일생이 저주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삶을 사셨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일류 인생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삼류 배우는 자기 연기에만 신경 쓰지만, 일류 배우는 상대방과의 호흡을 더 중요시한다.’ 예수님은 우리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광과 기득권을 포기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만 신경쓰느라 남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처럼 자신은 뒷전이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돌아보는 일류 인생을 살 순 없을까?

한비자는 말했다. ‘삼류 인생은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고, 이류 인생은 타인의 힘을 사용하고, 일류 인생은 남의 지혜를 활용한다.’ 나는 달리 정의하고 싶다.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 사는 사람은 삼류 인생. 타인의 힘과 지혜를 사용해서 사는 사람은 이류 인생.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빌어서 사는 사람은 일류 인생이다.

나를 믿는 건 한계가 있다. 아무리 날고 뛰어도, 별 볼 일 없다. 인간은 인간이니까. 최근 나는 오른쪽 어깨 힘줄이 끊겨서 조금 힘들다. 성경책 하나 들기도 힘들다. 힘줄이 그렇게 중요한지는 미처 몰랐다. 이게 별 수 없는 인간의 실체다.

다른 사람의 힘과 지혜를 사용해서 산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사는 것,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사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인간은 별 수 없는 인간임을 아는가? 절대적인 도움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지혜와 힘도 한계를 가진 것이다. 더구나 인간관계라는 게 어떤가? 오늘 좋다가 내일 등을 돌릴 수 있고, 심지어 원수로 돌변할 수도 있다. 그게 인간이다.

그래서 일류 인생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산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는 인생. 즉 은혜로 사는 인생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장담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가까이 갈 수밖에 없고, 멀어지는 게 두려운 존재.

오늘 2부 예배를 마치고 안수집사님 한 분이 목양실을 찾아왔다. 몇 년 전에 대장암으로 치료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위에 전이가 되어 위 전체를 절제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게 쉽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하고 고통을 당하는데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몇 주간 힘겨운 싸움을 싸우고 오랜만에 교회를 왔다. 집사님이 말했다. “목사님, 죽었다가 살았습니다.” 이게 인생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

그래서 우리는 힘겨운 일이 있을 때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분을 향해 간구해야 한다.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렇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그렇지 않고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기에.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했을 때 삼류 인생은 울어버린다. 이류인생은 입술을 깨문다. 그러나 일류 인생은 웃는다.’

살다 보면 실패할 때도 있다. 생각하는 대로 잘 안 될 수도 있다. 원하는 대로 일이 진척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울지 않으련다. 입술을 꽉 깨물고 속상해 하지도, 억울해 하지도 않으련다. 내가 다시 해 보겠다고 입을 깨물지도 않으련다. 차라리 한바탕 웃어버리련다. 하나님께 맡긴 인생이니까.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살아가는 인생이니까.

실패의 때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사닥다리니까. 미래는 실패에 대한 깨달음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내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이 함께하는 내일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죽음에서 승리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최종 승리를 주실 수 있으니까. 그러니 실패한 때도 호탕하게 한바탕 웃어버리고 말련다.